현직 외교관이 쓴 영화평론서 <영화관의 외교관>

헐리우드 키드도 놀란, 영화 교과서
기사입력 2009.07.14 17:32 조회수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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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의 외교관>(도서출판 리즈앤북)을 단숨에 읽으면서, 15년 전 쯤 발표되어 화제를 모았던 소설가 안정효 선생의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라는 책을 떠올렸다. 주인공 임병석은 쉬는 시간 10분 동안 946명 배우들의 출석부를 작성하고, 드라큐라 영화에서도 에로티시즘의 진수를 발견해 내며 영화 제목만으로도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엮어내는 아이다.


           



각종 영화서적을 집어 삼켜먹은 듯 헐리우드 영화의 소식통으로 군림하는 임병석은 신창고 아이들과 황야의 7인을 결성, 기상천외한 영화 순례를 주도한다. 아버지가 병을 불어 만드는 모습과 누나가 음란하게 춤추는 모습을 아무렇지도 않게 구경할 정도로 자신의 현실을 자신의 것으로 느끼지 않는 그는 어쩌면 자기 생애의 2/3를 보낸 어두컴컴한 극장 안에서 더 이상의 성장을 멈추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도 나중에 영화로 만들어진 최민수 주연의 영화를 보면서도 안정효 선생의 영화 사랑과 광적인 번잡증에 놀랐다. 어쩌면 저렇게도 많은 영화와 배우들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글로 쓸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글쟁이를 꿈꾸는 나도 저런 번잡한 관심증 환자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고뇌였다.


 


최근 발간된 <영화관의 외교관>은 안정효 선생을 닮은 외교관 박용민이 어린 시절 늘 자신을 영화관으로 이끌었던 모친에게 감사하면서 영화광이 되어버린 자신의 이야기와 영화 사랑을 한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다.


 


<영화관의 외교관>에는 국내 영화 6편과 유럽, 미국, 홍콩, 일본 영화 50여 편을 구체적인 내용과 감독, 배우에 관한 이야기 등을 곁들여 섬세하게 다루고 있다. 안정효 선생이 임병석을 통하여 10분 동안 배우 946명의 이름을 줄줄 작성하는 것처럼 말이다. 


 


외교관 박용민은 좋아하는 배우를 딱 한 명 고르라니 로버트 듀발라고 꼽는다. 쟁쟁한 스타를 놔두고 하필이면 로버트 듀발인가? <대부>에서 콜레오네가의 변호사 톰 헤이근으로 나오는 듀발은 한마디로 조연 전문이다. 사소한 배역도 멋지게 소화하는 조연이라면 화려한 외교 무대의 막후에서 실타래처럼 엉킨 문제를 매끄럽게 풀어가는 외교관의 모습과 닮은 듯도 하다.


 


친한 벗과 소주잔을 기울이며 잡담하는 기분으로 쓴 글이라며 '영화 보며 딴생각하기' 초식이라고 눙치지만, 영화 줄거리와 배우와 감독, 그리고 그 바깥세상을 넘나들며 풀어가는 얘기 속에는 묵은 장맛과도 같은 영화를 향한 사랑이 녹아있고, 세상을 바라보는 보석 같은 통찰이 숨어있다.


 


2008년 아카데미 시상식을 앞두고 약물과 알코올 중독으로 황폐해진 에디트 피아프를 연기한 의 마리온 코티야르의 여우주연상 수상을 점치며 '아카데미 공식'을 유도한다. 오스카는 첫째, 망가진 모습을 마다하지 않고 둘째, 폭발적인 연기를 선보이는 여배우의 몫이란다. 타석에 선 노련한 타자의 예리한 선구안을 뺨치는 관록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의 액션 장면을 눈여겨 본 뒤 무술 감독 리처드 라이언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뉴욕의 친구를 통해 라는 계간잡지를 입수한다. 물론 "극중 인물은 보이지 않고 무술 감독만 보이는 현상을 피하고 영화를 다 본 후에 싸움의 테크닉이 아니라 극중 인물이 기억에 남아야 성공한 무술 감독"이라는 인터뷰 내용은 그러한 집요함의 노획물이다.


 


<메리 포핀스>에서 아이들의 코 묻은 동전마저 예치하려는 은행장의 탐욕스런 모습에 놀란 고객들이 인출사태를 벌이는 해프닝을 떠올리며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에서 비롯하는 '걱정의 자기실현 능력'을 우려한다.


 


에서는 자신의 매력을 과신하다 처참한 결말을 맞는 주인공의 모습에 빗대어 한정된 자원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중동 산유국의 불안한 풍요를 지적하기도 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제작 주연한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대사, "권투는 부자연스러운 행위다. 왜냐하면 권투 속의 모든 것은 거꾸로이기 때문이다. 왼쪽으로 움직이고 싶으면 왼발을 내딛는 대신 오른쪽 발가락에 힘을 주고 민다. 오른쪽으로 움직이려면 왼발가락을 사용해야 한다. 제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으레 그러듯이 고통으로부터 도망치는 대신, 그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때때로, 펀치를 날리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뒤로 물러서는 것이다. 너무 물러섰다가는 싸움이 되지 않지만"에서는 '누구나 행복을 갈구하지만, 정작 인간의 영혼을 정화하는 것은 고난과 고통입니다'라는 아포리즘을 건져낸다.


 


사랑이 깊은 만큼 안타까움도 많다. 비슷한 설정의 닮은꼴 영화가 쏟아지는 모습에 '임신 촉진제 처방을 받은 산모들이 종종 출산하는 쌍둥이'라고 질책한다.


 


가 개봉 직전 국내 언론에 '푸줏간 캐시디와 석양의 소년'이로 소개된 예를 들며 "소설 번역 정도의 노력을 들인다면 '백투더퓨처'라고 놔둘 리는 없다"는 따끔한 충고에는 절로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또한 에로 비디오 업계가 엉터리 제목을 정하는 행태를 보고 있자면 저절로 웃음이 난다고 한다. 연필부인 흑심 품었네, 박하사랑, 인정상 사정할 수 없다, 라이언일병과 하기, 반지하 제왕, 살 흰애  추억, 털밑 섬씽, 여보! 보일러 댁에 어머님 놔 드려야 겠어요 등등 형편없는 제목 패러디가 마음을 어둡게 하며 패러디에 능하지만, 창작에 약한 사회는 냉소적인 사회라고 비판하고 있다.


 


한국영화를 향한 강렬한 애증을 보여주는 글도 눈에 띈다. "첩보원 남궁원이 동남아를 일대로 007처럼 활약하는 <극동의 무법자>는 대학 시절 하숙집에서 저녁을 먹다가 유선TV에서 우연히 보았는데, 하도 놀라워서 밥을 잘 씹지도 못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마치, 다락을 뒤지다가 머리 벗겨지고 배나온 아버지의 영화배우 뺨치던 젊은 시절 사진을 발견했을 때 느낄 법한 즐겁고 놀라운 배신감 같은 걸 느꼈다고나 할까요."


 


전문적인 용어를 섞지 않고 영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편안하게 풀어가는 글을 읽노라면 다양한 장르의 작품에 대한 정보를 얻게 된다. 영화 밖 세상에 대한 관련 지식은 덤이다.


 


아울러 영화 관람의 세 가지 방식을 프랑스 학자 크리스티앙 메츠의 입을 통하여 자세하게 알려준다. 첫째, 나르시스적인 동일시로 연기자와 관객의 동일시를 통하여 등장인물과 나의 합일을 꿈꾼다. 둘째, 관음증 그러니까 엿보기를 통하여 멀쩡해 보이는 신사숙녀의 내밀한 치부를, 미남 미녀의 정사장면을, 또는 주인공의 남모르는 고민을 3자의 시선으로 보게 하여 즐거움을 준다. 셋째는 페티시즘이다. 성적인 함의가 없는 대상물을 보면서 성적인 흥분을 느낀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표현이다.


 


영화배우 박중훈은 ""영화란, 만들 땐 만드는 사람의 것이지만 그것을 세상에 내놓는 순간부터는 보는 사람 각각의 것이 된다. 때론 사려 깊게 인생을 말하고  때론 놀라운 통찰력으로 자신만의 영화이야기를 풀어놓는 작가의 시각은 만드는 일에 종사하는 제게 큰 자극을 준다. 그 자극이 제게 기쁨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의 시선엔 따뜻함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그  온기가 많은 이에게 위로가 되길 바란다."라고 추천사를 통하여 말하고 있다.


 


<영화관의 외교관>을 쓴 저자 박용민은 1966년생이며, 외교통상부 북핵협상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외교관이다. 그는 학창 시절부터 연극과 영화 관람, 글짓기, 그림 그리기, 사진 찍기, 기타 치며 노래 부르기 등 다양한 취미 활동을 즐겼다. 이 책의 삽화들은 그가 직접 그린 것들이다.


 


연세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외교통상부에 몸담은 후,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국제정치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주유엔대표부, 주오만대사관, 주미국대사관, 주인도네시아대사관 등지에서 근무했다.


 


인도네시아에서 영사로 재직 시 젊은 화가 김영민과 함께 2인전으로 사진을 전시하기도 했고, 인도네시아 외교부 밴드와 함께 '자카르타 재즈 페스티벌'에 출연하기도 했다. 언젠가 자작곡 음반을 한번쯤 내 보고 싶다는 그는, 현재는 짬짬이 시간을 내 직장 동료들과 '외교통상부 음악연주동호회'에 참여하고 있다.


 


그는 2007년 5월부터 10개월간 <월간 포브스코리아>에 영화 칼럼을 기고했고, 미국과 인도네시아 여행기인 <내 마음에 남긴 발자국>도 곧 출간될 예정이다.


 


 

[김수종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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