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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인] 이봉창 의사가 한인애국단 단원으로 입단하면서 선서한 ‘선서문’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봉창 의사는 일명 ‘동경의거’로 알려진 1932년 1월 8일 도쿄의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끝내고 경시청 앞을 지나가던 히로히토(裕仁) 일왕에게 폭탄을 투척하였지만 의거는 실패로 돌아갔고 이봉창 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그 해 10월 비공개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이치가야(市谷)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하지만 이 사건은 중국인들의 항일의식에 큰 영향을 끼쳐 일제가 중국의 항일운동을 무력으로 억압하고자 1932년에 일으킨 제1차 ‘상해사변’을 촉발시켰고, 이어서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공원 의거’가 거행되었다는 점에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선서문
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
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야 한인
애국단의 일원이 되야 적국의 수
괴를 도륙하기로 맹서하나이다
대한민국십삼년십이월십삼일 선서인 이봉창
한인애국단앞
보물로 지정된 ‘이봉창 의사 선서문(李奉昌 義士 宣誓文)’은 1931년 12월 13일에 작성된 것으로, 이봉창 의사(1900~1932)가 일본에 대한 항쟁을 다짐한 국한문혼용 선서문으로 이 의사가 한인애국단 제1호 단원으로 입단하면서 선서한 당시 작성된 것이다. 이 선서문은 김구(金九)가 결성한 항일독립운동단체인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제출된 것이다. 이 날 서명을 마친 이봉창 의사는 안중근 의사의 막내동생이자 한인애국단 임원이었던 안공근(安恭根)의 집에서 양손에 수류탄을 들고 선서문을 가슴에 단 채 기념사진을 촬영했으며, 이 때 찍은 흑백사진이 전해지고 있다.
‘이봉창 의사 선서문’은 이 의사의 의거 행적과 한인애국단의 활동, 항일투쟁의 역사를 증명하는 귀중한 역사적 산물이다. 이듬해 훙커우공원에서 의거를 단행한 윤봉길 의사가 작성한 선서문(1972.8.16. 보물 지정)과 함께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유물 중 하나로 평가된다.
이 선서문은 1932년 4월 29일 일본 천황의 생일 축하 기념식을 거행하는 상하이 훙커우공원의 거사에 앞서 윤봉길 의사가 한인 애국단 단장 김구 앞에서 자필로 쓴 것으로, '나는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 애국단의 일원이 되겠다' 내용이 담겨 있다.
참고로 ‘이봉창 의사 친필 편지, 봉투’ 및 ‘의거자금 송금증서’ 또한 이봉창 의사의 의거 전개과정과 항일독립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유물로 이봉창 의사의 유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점에서도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이봉창 의사 친필 편지, 봉투’는 1931년 12월 24일에 동경에 있는 이봉창 의사가 상해의 김구 선생에게 의거 자금을 요청한 것으로, 의거실행을 “물품이 팔린다.”라는 대체 용어로 약속하여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봉창 의사 의거자금 송금증서’는 1931년 12월 28일에 김구 선생이 상해에서 동경에 있는 이봉창 의사에게 의거자금 100엔을 보낸 송금증서이다. [권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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