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시대의 억압에 저항하는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보여준 바스키아 국내 회고전

롯데뮤지엄, 《장 미쉘 바스키아 •거리, 영웅, 예술》 전
기사입력 2020.10.22 11:34 조회수 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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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도 작품 <더 필드 넥스트 투 디 아더 로드The Field Next to the Other Road>(사진 우)는 바스키아의 첫 개인전 《세이모 SAMO》에 출품 된 초기 작품 중 하나이다. 1981년 제작된 작품 중 가장 큰 그림으로 페인트를 겹겹히 칠하고 아크릴, 오일 스틱, 스프레이 페인트와 같은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여 완전한 인체의 사람을 구현한다. 작품은 인체를 표현한 바스키아 초기 작품의 특징을 볼 수 있는 대표작이다. 거대한 화면 속에는 뼈가 고스란히 드러나 보이는 형상의 인간이 소를 끌고 가고 있으며 앙상한 인간과 달리 끌려가는 소는 풍성하게 표현되어 있다. 동물의 죽음을 통해서 자본주의 소비 사회를 비판해온 바스키아는 인간과 동물을 극적으로 대비시켜 거대한 화면에 배치 했다. 이 작품에서 바스키아의 강렬한 주제였던 죽음은 죽을 운명에 처한 연약한 동물의 모습으로 더욱 극대화되며 누군가의 희생으로 얻어지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이 작품은 2천억 원에 거래되었다고 한다.

 

 

 

 

[서울문화인] 1980년대 초 뉴욕 화단에 혜성처럼 나타나 생을 마감하기까지 8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3,000여 점의 작품을 남긴 팝아티스트 바스키아의 주요 작품 150여 점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전시가 잠실 롯데뮤지엄에서 지난 108일부터 열리고 있다.

 

1960년대부터 가속화된 산업화에 따라 미국 전역에는 상품 판매를 위한 신문, 잡지 등의 인쇄물들과 코믹북, 텔레비전, 영화 등 대중매체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미디어에 기반한 이미지들은 도시의 시각문화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 잡았으며 이에 따라 대량생산과 복제의 방식들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예술 경향이 나타나면서 1970년대 후반 뉴욕 미술계는 서로 다른 예술 경향들이 교차하고 있었다. 대상의 본질만을 남기고 불필요한 요소들을 제거하는 미니멀리즘과 형식을 거부하고 작가의 사고 자체가 작품이 되는 개념미술은 새로운 시각문화의 큰 축을 형성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한 팝 아트는 영화, 광고, 텔레비전 등 대중매체의 이미지를 전략적으로 차용하며 많은 인기를 누렸다. 또한 힙합과 그래피티 등 도시를 배경으로 성장한 거리 예술이 붐과 함께 언더그라운드 음악과 미술, 연극과 영화 등이 혼합된 실험적 예술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1970년대 수작업을 극도로 배제하고 규격화된 산업재료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미니멀리즘과 실크스크린, 사진, 복사 등 대량생산 기법을 도입해 대중매체의 이미지를 재현하는 팝아트가 미술계의 중요한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팝아트는 미국 문화를 지배하는 물질만능주의를 거부하기보다는 소비문화를 찬양하면서도 조롱하는 양면적 가치를 띠며 상업미술과 소비문화를 예술의 영역으로 가져왔다. 앤디 워홀은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유명인들의 초상 작업을 대량으로 제작했으며 재스퍼 존스(Jasper Johns)와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uerg)는 실제 사용하는 물건들을 화면에 붙여 삶과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작품들을 선보였다. 뉴욕은 상업 미술과 소비문화를 예술로 승화시킨 발원지로서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예술과 유행을 창조하는 거대한 실험실이 되었다.

 

이번에 소개되는 장 미쉘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b. 1960-1988)는 시작과 동시에 최고의 인기 작가 반열에 오르며 지금까지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수수께끼처럼 다양한 해석을 낳고 있다. 1960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아이티공화국(Republic of Haiti) 출신의 아버지와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계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1978년 집을 나와 거리 생활을 하던 바스키아는 이러한 대안공간에 머물며 예술을 실험하고, 소호와 이스트 빌리지 등지에 그래피티를 남겼다. SAMO©는 십대들의 장난처럼 시작됐지만, 그 속에는 주류 미술계와 사회를 향한 강력한 저항의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무질서하게 휘갈겨 쓴 듯한 글자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이미지와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사회 전반의 모순적 상황을 유머러스하게 조롱하는 강력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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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미쉘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b. 1960-1988)

 

 

하지만 바스키아는 키스 해링(Keith Haring)과 케니 샤프(Kenny Scharf)를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회화 작업으로 옮겨가고 SAMO©를 작품 안에 서명처럼 사용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한다. 바스키아는 1982년 아니나 노세이 갤러리에서 미국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바스키아는 대규모 그룹전 더 타임스 스퀘어 쇼 The Times Square Show뉴욕/뉴 웨이브 New York/New Wave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작품을 대중에게 선보이게 되었고, 미국의 대표적인 문화·예술 잡지 아트 포럼 Art Forum더 레이디언트 차일드 The Radiant Child라는 기사로 소개되어 명실상부 미술계 슈퍼 루키로 등장한다. 새로운 예술가를 발굴하려는 신생 갤러리들은 바스키아의 독보적인 행보에 주목했으며, 바스키아는 유럽에서 가장 권위 있는 전시 중 하나인 카셀 도큐멘타 7 Kassel Documenta 7에 작품을 출품하며 뉴욕을 넘어 전 세계에서 성공적으로 전시를 개최하며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새로운 시각예술의 형태이자, 모든 가치를 대체하는 바스키아의 SAMO©는 자신을 알리는 로고이자 브랜드로서 이후 작품 활동에 근간이 되었다.

 

앤디 워홀(Andy Warhol)을 존경했던 바스키아는 1982, 앤디 워홀의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되었다. 바스키아는 워홀과 인사를 나눈 뒤 작업실로 돌아가 워홀의 초상화를 그리고 바로 다시 가져와 워홀에게 보여주었다. 바스키아의 천재성을 알아본 워홀은 바스키아와 함께 예술적 교감을 나누며 공동작업을 시작했다. 당시 바스키아는 워홀을 의지하고 존경했으며 워홀에게 바스키아의 젊은 에너지는 새로운 예술적 동력이 되었다. 1983년 바스키아는 휘트니 비엔날레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 비쇼프버거의 제안으로 프란체스코 클레멘테(Francesco Clemente), 워홀과 협업한 전시를 개최한다. 하지만 1985년 워홀과 함께한 전시가 미술계의 혹평을 받으면서 워홀과의 공동작업은 막을 내리게 된다. 이들은 1985년까지 2년간 150여 점이 넘는 작품들을 공동으로 제작하면서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하지만 1987년 아버지와도 같았던 앤디 워홀이 수술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바스키아는 큰 충격을 받는다. 바스키아는 삶에 대한 의지를 내려놓고 그와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과도 연락을 끊은 채 코트디부아르의 아비장(Abidjan)으로 방문할 결심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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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과 바스키아

 

 

그러나 바스키아는 방문을 엿새 앞둔 812일 유명을 달리한다. ‘거리의 이단아에서 세계 화단의 유망주로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바스키아는 8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3,000여 점이 넘는 드로잉, 회화와 조각작품을 통해 시각예술뿐만 아니라 새로움을 대변하는 문화 전반의 아이콘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번 전시는 거리’, ‘영웅’, ‘예술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통해 바스키아의 예술세계 전반을 조망하는 회화, 조각, 드로잉, 세라믹 그리고 사진 작품 등 150 여점을 선보인다. 먼저, 뉴욕 거리에서 시작된 SAMO© (세이모)시기를 기록한 사진 작품을 중심으로 바스키아의 초창기 예술세계를 시작으로 창조한 영웅의 다양한 도상과 초상화를 통해서 삶과 죽음, 폭력과 공포, 빛과 어두움이 투영된 시대상과 인간 내면의 원초적 모습을 한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더불어 제작 방식이자 구성요소인 텍스트와 드로잉, 콜라주와 제록스 기법이 혼합된 작품들을 통해서, 함축적 은유와 상징으로 점철된 이미지들이 생성되는 과정뿐 아니라 앤디 워홀과 함께한 대형 작품을 전시해 서로 다른 두 거장이 교류하며 새롭게 발전시켜 나간 예술세계를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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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도 작품 <무제, 옐로우 타르 앤 페더즈 Untitled (Yellow Tar and Feathers)>(사진 우)는 바스키아가 처음 로스앤젤레스 여행 갔을 때 그린 그림으로, LA 가고시안 갤러리에서 열린 바스키아의 첫 전시회에서 선보인 작품이다. 여러 개의 나무 패널을 이어 붙여, 이등분한 화면에 제록스 드로잉과 또다른 라인, 물감이 뒤엉킨 레이어를 통해 한 화면 안에서 다양한 이야기를 전개한다. 검정색 라인으로 표현된 왕관을 쓴 젊은 유색의 영웅, 정의의 저울을 들고 있는 사람, 그리고 천사의 모습이 화면 상단을 가득 메우고 있다. 이는 인종차별을 당하는 유색인의 현실을 보여주고자 한 작품으로, 작품 하단에는 강렬하게 뻗어나간 붉은 터치들로 타르와 깃털의 공격을 당한 잔인함을 극대화 했다면, 작품의 상단은 이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진정한 영웅이 되어가는 장면을 보여 준다. 바스키아는 구체적 상황을 그린 자신의 드로잉 위에 또다른 라인으로 덮어 지워가며 작품을 완성해간다. 냉전시대 당시 지도를 표시할 때 노란색은 중립국 또는 제3세계 국가를 지도에서 표시하는데 사용되었다. 작품 전체 노란색을 덮어 당시 사회의 세속성을 보여주기도 하며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유색인종을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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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적으로 아프리카계 영웅들을 그려왔던 바스키아의 작품들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지만 보는 것에 대한 새로운 방식을 창조함으로써, 현재까지도 삶의 부조리한 가치에 의문을 던지며 삶과 예술의 경계에서 누구보다 긴 여운을 남긴 바스키아의 예술 세계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이번 전시는 202127()까지 진행된다. [허중학 기자]

 

 

 

 

 

 

[허중학 기자 ost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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