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당여관을 아시나요?

바둑과 운니동의 운당여관 이야기
기사입력 2009.07.16 00:23 조회수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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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인] 종로구 운니동에 있던<운당(雲堂)여관>을 아시나요? 지하철 3호선 안국역 인근 흥선대원군의 사저였던 운현궁과 토목회사인 삼환기업 뒤편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현재는 10층 규모의 낡은 오피스텔이 그곳에 터를 잡고 있다.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특히 그 옛날 조훈현 국수와 서봉수 국수의 대국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동아일보가 주최하는 한국에서 가장 전통 있는 바둑 타이틀전이었던 국수전(國手戰)이 열리던 장소였던 운당여관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운당여관과 국악인 박귀희 선생


 


운당여관은 원래 종로구 운니동 65-1번지에 있었던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양반 가옥이었다. 조선 순조 임금 시절, 궁중의 내관이 재목을 하사받아 지은 건물이다. 이후 몇 번 주인이 바뀌었는데,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가야금병창 예능보유자인 박귀희 선생과 남편 윤길병이 당시 한국 최고의 갑부였던 화신(和信)의 총수이며 친일파 기업인이었던 박흥식의 조카로 화신의 전무로 일하던 박병교로 부터 인수한 집이다.


 


경북 칠곡 출신의 박귀희(1921~1993)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국악을 좋아해 손광제의 국악교습소에 다니다가, 명창 이화중선에 발탁, 대동가극단에 들어갔다. 1937년 서편제 소리의 박동실 선생, 동편제 소리의 류성준 선생 등 기라성 같은 스승의 문하에서 판소리 다섯마당을 익혔고, 1940년 강태홍, 1942년 오태석으로부터 가야금 병창을 배웠다.


 


처음엔 가야금 병창보다는 판소리로 이름을 날렸다. 한양창극단에서 20여 년간 판소리에서 1급의 자리를 지켰고, 뒤늦게 그의 숨은 가야금 솜씨도 인정받아 1971년 가야금병창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이후 후진양성에 위해 1955년 한국민속예술학원을 설립했고 1960년에는 서울국악예술학교를 설립, 많은 후학들을 배출했다. 만년에 사저인 운당여관과 전 재산을 학교에 기부했다.


 


1951년 박귀희 선생과 남편 윤길병은 운니동 한옥을 구매한 후, 이웃한 시인 한상억 선생의 집을 포함하여 3~4채를 합쳐서 1958년부터 이름을 ‘구름 속에 있는 집’ 혹은 ‘스님들이 좌선하는 집’을 뜻하는 ‘운당(雲堂)’이라 짓고 여관으로 운영하였다. 1960년에는 정릉에 있던 순종의 비 윤씨의 별장도 이전 복원하면서 450평 한옥에 31개 객실을 가진 여관으로 확장했다.


 


박 선생은 1989년 운당여관을 국악예술고 재단에 기부할 때까지, 약 31년간 서울의 전통명소 중에 하나였던 운당여관을 직접 경영했다. 운당여관은 싸고 저렴하면서도 주택가에 위치하여 조용한 것이 특징이었다. 특히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의 사랑을 받았던 전통 숙박시설로 알려져 있다.


 


운당의 가옥 구조는 서울 경기지방의 전통 사대부 가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문간채와 사랑채, 안채, 곡간채, 행랑채, 별당으로 이루어졌으며 각각은 협문으로 이동하게 되어있다.


 


건립 초기부터 운당여관은 종로의 명소로 알려졌고, 1959년 한국 바둑의 최고봉인 국수전이 열리면서 바둑의 명대국장으로도 유명해졌다. 운당여관은 1989년 2월까지 운영되었으며, 현재 운당의 일부는 경기도 남양주 종합촬영소로 이전 복원되어 세트장으로 쓰이고 있으며, 나머지 일부는 계동 한옥체험관으로 이전 복원되었고, 그 나머지는 그 자리에 남아 식당으로 이용되고 있다. 운당여관이 헐린 터에는 월드오피스텔이 들어서 있다.


 


바둑 국수전과 운당여관 이야기


 


군 입대를 위해 일본유학 중에 귀국한 조훈현 9단에게 가장 치명적인 것은 모국어 실력이었다. 현대바둑의 창시자인 조남철 선생과 마주치는 경우에도 공손히 인사를 드린 후 “밥 먹었냐?”라고 할 정도로 그는 한국어에 서툴렀다.


 


하지만 그가 어느 정도 우리말 실력을 회복하고 한국바둑에 적응하자 관철동 한국기원의 프로들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졌다. 그의 손에서는 천변만화(千變萬化)와 같은 변화의 수가 바둑판 위를 날라 다녔다. ‘부드러운 바람, 빠른 창’ 조훈현을 가리켜 사람들은 그렇게 지칭했다. 조훈현이 기전들을 휩쓸며 천하통일을 눈앞에 두자, 관철동은 누군가 그의 앞을 막아줄 반란군의 수괴(?)를 기다리게 된다.


 


그때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한 사내가 귀국했다. 합천 출신의 하찬석. 바둑판의 다양한 변화를 차단하는데 일가견을 가진 말하자면 정통파였다.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하찬석을 가리켜 세상은 ‘무딘 칼날의 명검’이라 불렀다. 그런 하찬석은 78년 국기전, 왕위전, 국수전, 패왕전의 도전권을 모두 거머쥐고 조훈현에게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밀었다.


 


바둑사상 초유의 4경기 20번의 싸움이 동시에 시작된 것이다. 관철동의 호사가들은 종로 골목의 선술집에서 그 최종결과를 놓고 정겨운 입씨름을 벌이곤 했다. 12전 12패. 하찬석은 단 한판도 이기지 못하고 조훈현 앞에 절망적으로 무릎을 꿇었다.


 


대국이 끝나고 운당여관 주변의 선술집에서 호사가들은 말없이 술잔을 들이켰다. 하찬석은 관철동을 떠나 고향 합천으로 내려가 은거했고 돌아오지 않았다. 


 


72년 명인전 최종국. 중반의 대접전 중에 조남철 9단이 사석 하나를 바둑판 위에 올려놓았다. 돌을 던진 것이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서봉수 초단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여드름이 아직 가시지 않은 19세 소년이 조남철의 명인 타이틀을 함락시킨 것이다.


 


바둑역사 한켠에 아직도 회자되는 파천황(破天荒) 사건이었다. 서봉수의 인터뷰는 관철동을 더 경악시켰다. “정석을 잘 몰랐습니다. 하지만 오직 이겨야만 한다는 신념으로 두었습니다.” 버스표 두 장과 담배 한 갑, 짜장면 값만 들고 서봉수는 매일 관철동으로 출근했다. 당시의 바둑프로들은 모두 가난했고, 서명인은 더욱 그랬다.


 


나의 드신 홀어머니를 모시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매일 매일 이겨야만 한다는 것. 다른 것은 한 줄 아는 것이 없었다. 가로 세로 19줄 그 안에서 먹을거리를 구해야만 했다. 입단 전에 노량진 기원에서 만났던 드라마 올인(All in)의 실제 주인공 차민수를 서봉수는 싫어했다. 영화관 아들, 뛰어난 천재, 자유로운 영혼. 그게 싫었다.


 


80년 초여름. 작전명 ‘화려한 휴가’의 군화발이 광주로 진격할 때, 조훈현은 천하통일을 위해 마지막 남은 하나의 타이틀을 빼앗기 위해 서봉수 턱밑으로 진격해왔다. 광주의 넋 박관현이 계엄군을 피해 서울 어느 골목길을 서성일 때, 혁명의 지도자 윤한봉 선생이 미국 망명길의 배에 오르던 그 시각, 서봉수는 운당여관 대문을 붙잡고 주저앉았다.


 


조훈현의 빠른 창에 심장이 꿰뚫리며 천하통일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함박눈이 쏟아지는 그해 겨울, 서봉수가 왕위전 도전권을 들고 다시 운당여관의 문을 밀고 들어왔다. 조훈현이 소목에 두면 자신도 소목에 두었다. 조훈현이 날일자로 걸쳐오면 정확히 대각선 반대방향으로 날일자로 걸쳐갔다.


 


흉내바둑. 프로바둑에 전무후무했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기발한 발상이었다. 7차전이 열리던 날, 운당여관 주변은 애기가들로 인산인해였다. 서봉수는 운당여관 문을 열고나오며 싱긋 웃자, 와 하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조훈현의 첫 천하통일은 그렇게 허망하게 막을 내렸다.


 


셋방살이를 전전하던 한국기원이 1970년에 들어서면서 관철동에 버젓한 자기 집을 마련했다. 정권의 막후실세였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영향력을 행사해 지어진 건물이었다. 한국기원이 관철동에 사무실을 마련하기 이전에는 가장 큰 문제가 타이틀전 개최 장소였다. 사진도 찍고 공개해설까지 하기에는 적절한 장소가 없었다.


 


그러던 시절, 바둑애호가였던 운당여관 주인이 타이틀전만큼은 조건 없이 장소를 제공했다. 그리고 수십 번의 타이틀전이 운당여관에서 개최됐다. 한옥으로 지어진 운당여관은 무엇보다 타이틀전을 하기에 ‘그림’이 괜찮았다. 게다가 프로들이나 애호가들에게 친숙한 싼 선술집들이 주변 골목에 많았다.


 


한 때 타이틀 홀더였던 김인 9단 같은 경우 우승 상금을 일주일 내내 운당여관 인근 술집에서 날리곤 했다. 그런 정감 탓인지 관철동에 한국기원이 들어섰지만, 타이틀전은 언제나 운당여관에서 열렸다.


 


깊은 꿈을 꾸고 있는 나의 사무실


 


조선 말엽에 한 내관이 순조으로부터 하사받은 나무로 지어진 운당은 전통 사대부집의 전형을 가지고 있었다.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건물이었고, 해방 후에는 명창 박귀희 선생이 안주인이 되어 여관으로 전용되었다. 바둑역사의 산실이었던 운당여관에서 마지막 타이틀전이 열린 것은 89년의 일이다. 한옥이 헐리고 그 위치에 오피스텔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운당여관의 일부는 남양주 종합영화촬영소로, 일부는 계동의 한옥체험관으로 옮겨지며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종로구 운니동 65-1번지 운당여관. 월드오피스텔이 들어선 그 건물 902호는 내가 이용하고 있는 사무실이다. 이곳에서는 지금 진보정치의 깊은 꿈을 꾸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리고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열려있는 공간이다.


 


남양주 종합촬영소로 일부가 옮겨져 복원된 운당여관. 운당여관의 별채 한 칸은 지금도 운니동에 한옥형태로 남아 식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내일은 이곳에서 한번 쯤 밥을 먹어봐야겠다. 꿈을 꾸고 있는 사람들과 만나기 위해...


 


김수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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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종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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