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체국 편지쓰기 대회에서, 봉화군의 일본인 부인이 대상 수상

일본인들의 조선인 비하를 시어머님께 사과
기사입력 2009.07.17 17:07 조회수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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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인] 일본어를 공부하다보면 참 놀랍고도 화가 나는 표현이 있다. ‘일회용 카메라’를 뜻하는 ‘바까총 카메라’라는 말이다. 요즘은 ‘츠카이스테 카메라’라는 말로 ‘한번 쓰고 버리는 카메라’라는 의미의 단어를 많이 쓰지만, 아직도 나이든 사람들은 일회용 카메라를 바까총 카메라라고 흔히 말한다.


 


일본어의 바까총은 ‘바보 조선인’의 준말이다. 다시 말해 ‘바보도 조선인도 쓸 수 있는 카메라’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단어이다. 동경에서 근무할 때 같은 사무실에 일하던 게이오대학을 나온 재원이었던 코즈카타씨에게 나는 “바까총이라는 단어를 알고 있냐?”고 물어보았다.  


 


그의 대답은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김상, 저는 부모님에게 그 말은 절대 입에 담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고 배웠습니다. 특히 한국(조선)사람 앞에서는 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사실 나는 그 의미를 알고 있었지만, 전혀 모르는 기색을 하고 넌지시 다시 물었다. “아니 왜요. 나는 상관없으니까? 대답해 주세요?” 그는 한참을 망설이더니 나에게 머뭇 머뭇거리는 말투로 “바까총이란 바보 조선인이라는 표현으로, 흔히 망하는 바까 조센징의 준말입니다. 따라서 아주 나쁜 말이고, 의미를 잘 모르고 쓰는 바까총 카메라라는 말 역시도 절대로 써서는 안 되는 말입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그의 부모님에게 어린 시절부터 가정교육을 철저히 받아서인지 나에게 너무 조심스럽게 대답을 했다. “그래서 저는 그냥 일회용카메라를 츠카이스테 카메라라고 말하고 반드시 그렇게 써야 한다고 배웠습니다.”라고 말을 정리했다.     


 


갑자기 일본인들의 조선(인) 비하에 관한 단어를 서두에 꺼낸 이유는 지난 5월 한 달 동안 지식경제부 산하 우정사업본부가 주최하여 응모를 받은 2009년 ‘제10회 보은의 달 편지쓰기 대회’에서 경북 봉화읍에 거주하는 일본인 부인 이노세 요시미((猪瀨 良美)41세, 일본 이바라키현 출신)씨가 바까총 카메라에 관한 글로 일반부 최고의 영예인 대상을 수상했기 때문이다.


 


우정사업본부는 국민정서 함양과 청소년들에게 편지쓰기 문화 보급은 물론, 보은의 달을 맞아 평소 사랑하고 존경하는 분들에게 그동안의 노고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며 국민의 편지쓰기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지난 5월 한 달 동안 전 국민을 대상으로 공모한 바 있다.


 


주최 측에 관계자에 따르면, “이노세씨의 ‘우리 오까상 께’라는 제목으로 쓴 보은의 편지가 대회 최고의 영예인 대상(지식경제부 장관상, 트로피, 부상)을 차지하는 영광을 안았다.”고 한다.


 


이노세씨는 지난 2000년 경북 봉화군에 사는 남편 이동수(46)씨를 신앙의 인연으로 만나 결혼하였으며, 평소 지극정성으로 며느리에게 자신의 친딸 이상으로 자상하고 살갑게 대해주시는 시어머니께 그동안 열심히 익혀온 한글로 처녀 편지를 썼다.


 


한국과 일본과의 잔혹한 옛날의 역사에 대해 어머님은 항상 미소를 머금고 사신다고 전제하고, ‘바보도 조선인도 쓸 수 있다’는 ‘바까총 카메라’를 비유하여, 일본이 한국 사람을 너무 무시하고 업신여겼다는 사실을 알고 ‘너무 너무 마음이 아프고 잘못된 역사가 원망스럽고, 모르는 것도 죄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며, ‘타민족을 업신여겼다는 사실을 알고 너무 무서웠다.’라고 했다.


 


‘일본시대 어머님의 친정아버님은 일본사람이 만든 철도에서 일을 했는데 일본이 철수하고 퇴사 한 후 갖은 고생 끝에 병들어 돌아가시고, 어머님은 초등학교 4학년을 끝으로 학교를 못 다니고, 남은 가족들은 일본사람들의 지배 때문에 고생고생 하신 일들이 가슴에 미어온다.’고도 썼다.


 


한국에 와서 첫아이 유산의 슬픔이 채 가시기 전 둘째 셋째 아이를 출산하였을 때 단숨에 달려와 “친정어머니라 생각하고 사양치 말고 뭐든지 말하라!”라며 “머리에서 발끝까지 몸을 닦아주고 꼼꼼히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주셨다.”며 그 애틋한 정성과 고마움에 대해 편지글로 옮겼다.


 


시어머님께 효도 한 번 못해드리고, 또 일본 친정에 전화라도 한 번 할라치면 다른 사람들은 전화요금 때문에 이 눈치 저 눈치 눈치를 살피지만 이노세씨는 그런 근심 걱정 하나 없이 살도록 해주시는 배려가 너무 너무 고맙단다.


 


또한 이 편지에서 ‘손자들에게 할머니께서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를 잘 들려주셨으면 좋겠다면서, 어머님의 건강과 행복을 빌고 또 빈다.’ 며 끝을 맺었다. “처음 결혼하고는 일본에도 자주 건너가고 정이 들지 않아 많이 힘들었으나, 지금은 아이도 두 명이나 생기고 많이 적응하고 이웃들과 정도 많이 들어 행복하게 산다며, 뜻밖의 큰 영광스런 수상소식에 정말 기쁘다.”라며 “상금은 아픈 남편의 병원비에 보태 쓰겠다.”고 말했다.


 


한편, 시상식은 지난 16일(목) 서울 중앙우체국에서 열렸다.



 


 


다음은 이노세 요시미씨의 편지 전문이다.


 


우리 ‘오까아상’(어머님)께


 


따뜻한 봄이 왔다는 소식을 전해주는 목련이나 벚꽃들은 언제 사라졌는지 벌써 새잎들이 우거진 계절이네요. 어머님, 다리는 어떠세요? 속은 괜찮으시고 잘 잡숫고 계시는지? 우리는 덕분에 잘 지내고 있어요. 9년 전에 제가 일본에서 시집와서 한번 일본말로 쓴 편지를 드렸지만, 이렇게 한국말로 어머님께 편지를 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죄송한 마음이 들어요.


 


어머님, 저는 지금도 어머님이 어떻게 일본사람을 며느리로 받아들이셨는지 신기해요. 9년 전에 어머님이 처음 저를 보시고 ‘요꾸 기마시다네!(잘 왔네)“라고 일본말로 인사 해주셨어요. 생각이 나세요? 제가 예상치 못했던 어머님의 입에서 나온 일본말... 정말 반가웠습니다. 그때 저는 한국말이라고 하면 ‘안녕하세요’ 밖에 몰랐으니까요. 그 배경에 한국과 일본사이의 잔혹한 역사가 있다는 것을 어머님의 미소 덕분에 잊고 지냈습니다.


 


어머님, 셔터만 누르면 자동으로 필름을 감아주는 카메라가 있잖아요. 옛날에 그 카메라는 일본말로 ‘바까총 카메라’라고 불렀어요. 그 카메라의 이름이니까 저도 당연히 ‘바까총 카메라’라고 불렀지요. 근데 나중에 교회언니한테 놀라운 사실을 들었어요. ‘바까총 카메라’의 뜻은 ‘바보도 조선 사람도 쓸 줄 아는 카메라’래요. 그 사실을 알고 너무 마음이 아프고, 잘못한 역사가 원망스러웠고, ‘모른다’는 것도 죄라고 알았습니다. 모른다고 해도 한민족을 업신여긴 말을 썼는 것은 사실이니까 왠지 무서웠어요.


 


어머님의 친정 어버님은 일제 시대 때 일본사람이 만들었다는 철도국에 다니셨다고 하셨지요? 집도 ‘다다미’가 있는 일본식으로 지었는 집에 사셨고, 구두도 신고 다닐 수 있을 정도 유복한 생활을 하셨지요. 그래도 전쟁이 끝나자 일본사람들이 다 일본에 철수하고 아버님은 실업자가 되셨고, 그 후 여러 가지 일을 하시고 노력하셨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졌답니다. 공부를 좋아하는 소녀였지만 어머님은 결국 국민학교 4학년 까지 다니고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얼마 후 어머님의 아버님은 병들고 하늘나라에 떠나셨다고....


 


혹시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지 않았더라면 어머님의 가족은 행복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럴 때마다 가슴이 아파요. 그래도 일본말을 썼던 시절을 가끔 그리워하시는 어머님... 정말 감사합니다. 어머님, 어머님은 결혼하시고 나서도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네요. 아기가 태어나서 기쁨도 잠깐사이, 남편이 전쟁터의 이슬로 사라졌다고 들었어요. 그때 어떻게 그 슬픔을 견디셨을까?
 
제가 첫아이를 유산하고 너무 슬퍼서 힘들었을 때, 어머님의 젊은 시대의 아픔을 생각해봤습니다. (그래도 하느님이 데리고 고 갔는 사람이 제 남편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아이는 또 갖을 수 있잖아)라고 자기 자신을 달래고 또 달랬어요. 뭐 보다 승목이 아빠가(당신의 아들이) 그런 저를 슬픔 속에서 구해주었어요. 그래도 어머님은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을까? 얼마나 우셨을까?


 


어머님, 그렇게 한이 많은데도 어떻게 그렇게 밝게 웃으시고 남을 배려하는 넓은 마음을 갖고 계시는지..? 제가 처음 분만실에 들어갔을 때 한숨에 달려와 주셨잖아요. 수술로 아이를 낳고 입원하는 동안에도 “친정엄마라고 생각하고, 사양치 말고 뭐든지 말해”라고 다정하게 말씀해주시고, 정성껏 우리 母子를 돌봐주셨지요. 특히 열이 나서 땀으로 젖었던 제 몸을 따뜻한 물수건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하게 잘 닦아주셨을 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어머님, 요즈음 전화를 드리면 마지막에 “전화 고맙다”라고 말씀해주시는 어머님, 전에는 용건만 들으시고 전화비가 아깝다고 끊는 것이 바쁘셨는데...


 


어머님의 건강보다 저의 류마티스 관절염을 걱정해주시는 어머님. 어머님, 정말 친정 엄마 같습니다. 효도 못해드리고 죄송하지만, 어머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우리니까 어머님께 걱정 시키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어머님, 태어났을 때부터 한 달 동안 어머님 품속에서 자란 손자들... 아직 막내가 6살이에요. 나중에 커서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어머님이 옛날이야기를 잘 들려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님 건강하셔야 해요! 그리고 이제부터는 보다 더 많은 행운이 찾아들기를 빌고 또 빕니다.


 


2009. 5. 20


 


일본며느리 이노세 요시미(猪瀨 良美) 드림


 


 


김수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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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종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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