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종의 영주, 봉화여행기] 금성대군의 숨결을 느끼며 단산면 고치령에 오르다.

기사입력 2009.09.11 04:00 조회수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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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인] 지난 주말(22~23일) 선배 3명과 함께 경상도 영주시, 봉화군에 다녀왔다. 여름휴가의 막바지를 어떻게 보낼까 고민을 하다가 선배들을 모시고 내 고향에 다녀오는 것으로 정했다. 졸지에 관광가이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22일(토) 오전 6시 혜화동 로타리에서 만난 일행은 별다른 막힘없이 2시간 반 만에 영주의 초입인 중앙고속도로 풍기 나들목을 통과하여 아침식사를 위해 3대 42년 전통의 청국장 전문점인 풍기역전의 인천식당으로 갔다.



 


영주사람이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인천식당은, 청국장 맛도 일품이지만 주인장의 소탈한 웃음과 인품이 더 유명한 곳이다. 식당 이름은 정감록을 보고 한반도 최고의 길지인 풍기로 이주해온 부친의 고향이 인천이라 붙여진 것이다.



 


인천식당의 대표 메뉴는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청국장이다. 그러나 안주인에게 청국장 못지않은 뛰어난 음식솜씨가 있으니, 바로 맛깔 난 밑반찬이다. 청국장이란 게 뚝배기 하나면 밥 한 그릇이 뚝딱인데, 무슨 반찬이 십여 가지 이상 나오는지 청국장 없이도 공기 밥이 바닥을 보였다.



 


아쉬운 것은, 고약한 냄새도 없이 맛나기만 한 이 청국장이, 지역에 좋은 콩이 없어 전남 고흥의 콩을 원료로 한다는 점이었다. 조만간 인근의 부석면 일대에서 좋은 콩이 나오면 그것을 쓰려고 생각 중이라고 한다.



 


인천식당의 맛난 청국장 요리는 허기진 아침 배만 부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따스한 친절함으로 마음까지 부르게 했다. 오랜만에 나의 방문에 놀란 주인장은 동행한 외지 손님들을 위해 직접 담근 청국장 2통을 선물로 주었다.



 


아침 일찍 나온 일행은 식사를 마친 다음, 식당의 좁은 화장실을 피해 풍기역 화장실로 같이 이동했다. 세수도 하고 볼일도 보고 로비에서 커피도 한잔 마시면서 잠시 담소를 나눈 다음 순흥면의 금성대군신단으로 향했다.



 


금성대군신단은 대군의 위리안치지 옛터이다. 위리안치는 중죄인의 거주지를 제한하기 위해 집이나 움막의 둘레에 탱자나무 울타리를 치거나 가시덤불로 에워싸서 외인의 출입을 금한 형벌로 요즘으로 말하자면 가택연금이라고 할 수 있다.



 


금성대군 위리안치지는 바로 금성대군이 순흥면 내죽리에 안치되어 있던 장소이다. 물론 현재의 위리안치지는 최근에 고증을 통하여 원래의 자리에서 30~40미터 뒤에 복원을 한 것이다.



 


세종대왕의 아들이며, 수양대군의 동생인 금성대군은 사육신들의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유배지를 떠돌다가 마침내 흥주도호부(순흥의 옛 이름)로 옮겨 오게 된다.


 


당시 폐위된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군 청령포 적소에 안치되어 있었다. 금성대군은 조카인 단종의 복위를 위해 순흥부사 이보흠 등과 고을의 군사들과 선비를 모으고, 영남의 선비들에게 격문을 돌려 단종의 복위를 꾀하게 된다.



그러나 관노의 밀고로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면서 그에게 동조하던 흥주도호부 지역의 수백 명 선비들과 가족은 물론, 흥주 30리 안에는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모두가 죽음을 당했다. 이 사건을 영주지방에서는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고 하여 특별히 기억하고 있다.



 


일행은 금성대군신단을 둘러본 다음 단종이 유배되어 있던 영월로 가는 지름길인 고치령(古峙嶺)을 도보로 올라보자는 계획으로 단산면 좌석리로 이동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금성대군신단에서 단종의 유배지였던 영월 청령포로 가는 길을 금성대군의 충절을 생각하면서 걷는 길이라는 의미에서 ‘금성대군 길’이라고 부르고 있다.



 


오전 10시 30분 좌석리의 고치령 민박집 앞에 차를 세우고 천천히 고치령을 오른다. 고개를 넘어 마락리까지 가지 않고 고갯마루에 있는 산신각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시간은 대략 3시간 내외로 보면 된다.



 


길 전체가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 있지는 않지만, 시멘트와 아스팔트를 반복하는 고갯길은 일부 비포장 흙길을 제외하곤 운동 삼아 걷기에는 적당한 길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길을 따라 개울이 흐르고, 나무가 좋아 햇볕을 강하게 받지 않는 관계로 남녀노소 누구나 편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차량 통행도 많지 않고, 한적한 곳이라 물소리, 새소리를 들으면서 천천히 걸었다. 등산을 위해서 트럭을 얻어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산신각에 기도를 위해 방문하는 사람들의 차량이 간간히 지나다닌다.



 


4명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걸으니 1시간 40분 만에 산신각에 도착한다. 영주사람들은 북쪽 영월에서 죽은 단종을 ‘태백산 신령이 되었다.’라고 믿고 남쪽 순흥으로 유배되었다가 안동에서 죽은 금성대군을 ‘소백산 신령이 되었다.’라고 믿는다. 그들 조카와 삼촌 사이에는 죽어서야 만날 수 있었던, 육신은 넘을 수 없었던 고개 고치령이 있다.



 


사람들은 소백과 태백 사이의 양백지간(兩白之間)인 고치령에 산신각을 짓고 금성대군과 단종이 영혼이 되어 만나는 자리를 마련해준 것이다. 아담한 산신각에는 태백산 신령인 단종과 소백산 신령인 금성대군을 함께 모셔져 있다.



 


산신각 안에는 금성대군과 단종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작은 인물화도 있다. 도로를 가운데 두고 좌측에는 포도대장군과 단산대장군이 소백지장 장승을 모시고 있고, 우측에는 태백천장을 가운데 두고 양백대장과 항락 장승이 둘러 서 있다.


 


고치령에서는 매년 정월에 단산면 기관단체협의회 주관으로 지역발전과 번영을 기원하는 ‘소 태백 양백지간 시산제’를 열리고 있다.



 


단종과 금성대군을 생각하면서 산신각에 절을 올리고 나서, 차와 간식을 먹으면서 잠시 쉰 다음 길을 돌아 하산한다. 내려가는 길은 아주 편하다.



 


한참을 내려오면서 사진도 찍고, 바람도 맞으면서 오다가 개울가에 앉기 편한 터를 발견하고는 오랜 만에 탁족(濯足)을 하기 위해 신을 벗고 물에 들어갔다. 일행 모두가 탁족을 하면서 이야기도 나누고 조선선비의 옛정취도 생각했다.



 


시원한 시냇물에 발을 씻으니 더워도 가시고, 무좀도 일순간에 좋아지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한참을 쉬다가 다시 짐을 챙기고는 좌석리에 돌아오는 시계는 오후 1시 30분을 지나고 있다.



 


고치령 도보 산책은 단종과 금성대군을 생각하면서 걸었던 아름다운 나들이였다.



 


 


김수종 기자.

[김수종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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