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양반의 도시 안동을 다시 보게 되다.

경북 종가 명품 관광 이야기_3
기사입력 2009.07.23 11:46 조회수 87

위 URL을 길게 누르면 복사하실 수 있습니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카오스토리로 보내기
  • URL 복사하기
  • 기사내용 프린트
  • 기사 스크랩
  • 기사 내용 글자 크게
  • 기사 내용 글자 작게

[서울문화인] 숙박을 한 고산서원(高山書院)의 아침은 너무 싱그럽고 상쾌했다. 오랜 만에 시골로 나온 기분이 좋아 한참을 걷고 돌아왔다. 더위와 모기의 강렬한 공격으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때문인지, 돌아와 대청마루에 누워 시나브로 잠이 들었다. 1시간 정도 잔 것 같은데, 아침식사를 하라고 난리다.


 


아침은 어제와 같은 장소인 서원 옆 별채에서 3~4인용 식탁에서 했다. 어제 저녁을 준비하신 안동의 유명 요리연구가인 권영숙 선생이 직접 차린 밥상이라 그런지 맛도 좋고 영양도 넘쳐나는 것 같아 보인다. 나는 김치와 호박 잎, 된장국에 반하여 신나게 허기를 달랬다. 식사를 마치고 안동식혜로 후식을 한 후 대청마루로 돌아와 다시 누웠다. 너무 졸려서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30분 정도 잠을 자니 피곤이 상당히 많이 가셨다. 모자라는 잠은 나중에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에는 보충을 하는 것으로 하고 일어났다. 오전에는 지역 서예가이며 안동전통문화연구회 회장을 맡고 계시는 청남 권영한 선생(http://www.andongkwon.pe.kr)의 가훈쓰기 행사가 있다고 하여 서원의 대청마루에 모여 앉았다.


 


사실 나는 여러 사람이 둘러 앉아 붓을 잡고 각각의 집이 가지고 있는 가훈을 쓰고 배우는 강좌라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청남 권영한 선생이 개개인의 본관과 성씨를 묻고 시조가 누구인지, 조상 중에 유명하신 분이 남기신 말씀 가운데 좋은 글귀를 택하여 가훈으로 남길 수 있도록 붓으로 글씨를 써주는 행사라는 것을 알고는 처음엔 약간 실망을 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화광동진(和光同塵, 빛을 부드럽게 하여 속세의 티끌에 같이한다는 뜻으로, 자기의 지덕(智德)과 재기(才氣)를 감추고 세속을 따름을 이르는 말. 또는 부처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그 본색을 숨기고 인간계(人間界)에 나타남을 이르는 말)’을 가훈으로 혼자 써보려고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많은 이들이 청남 선생의 주위에 둘러앉았고, 선생은 한 사람씩 자신의 앞에 앉히고는 성씨와 본관을 물었다. 외국인들에게는 인생의 좌우명이 될 만한 좋은 글귀를 써 주었고, 보통 사람들에게는 조상이 남긴 명문을 써 주었다.


 


청남 선생의 글 솜씨는 대단했다. 정말 ‘1분에 쓰는 짧은 글이었지만, 60년의 내공이 서려 있는 대작’이었다. 경주 김씨인 나에게는 김알지 공이 시조이시고, 삼국유사를 지은 김부식 공의 글에 나오는 공자의 말씀인 ‘일이관지(一以貫之,하나의 이치로써 모든 것을 꿰뚫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한 번에 끝까지라는 의미로 '초지일관(初志一貫)'이나 '일관(一貫)되다' 와 같은 의미로 쓰인다)를 써 주셨다.


 


성씨와 본관을 물으면 모든 것이 준비된 사람처럼 시조와 주요 인물을 말씀하시는 폼과 붓을 들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술술 써내려가는 솜씨가 범인의 경지는 아니었다. 마지막 사람을 위해서 특별히 족자에 그대로 글을 쓸 때는 모두가 감동하여 기립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안동의 서예가 청남 권영한 선생은 팔십이 다 된 노구에도 불구하고 아주 건강해 보였고, 연세대학을 나와 오랫동안 지역에서 수학교사로 봉직을 했다고 한다. 자신의 전공인 수학책은 물론 농업책, 성씨에 관한 족보책, 철학, 예절, 불교에 관한 책을 50여권 저술한 유명인사이기도 했다.


 


나는 글을 받아 고이 접어 가방에 넣었다. 30~40만원 하는 서예작품을 공짜로 받았다는 기쁨도 컸지만, 내 조상인 김부식 선생의 말씀 가운데 명구를 붓글씨로 받아 보관할 수 있게 되었다는 행복감이 더 좋았다. 다음 주 인사동에 가서 표구를 하여 집에 걸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 연우도 무척 좋아할 것 같다.


 


1시간 넘게 가훈쓰기를 한 다음, 청남 선생은 안동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함께 생활 속 예의범절에 대한 말씀을 하신 후 강의를 끝냈다. 행사가 끝난 후 일행은 다시 안동 시내에 있는 ‘탈춤전용공연장’으로 이동하여 ‘하회별신(河回別神)굿탈놀이’ 이수자인 류필기 선생(http://www.hahoemask.co.kr)으로부터 안동과 하회마을에 대한 소개는 물론 하회별신굿탈놀이와 각각의 탈에 대한 설명, 탈춤 따라 배우기 행사를 가졌다.


 


류 선생은 국보 121호인 하회탈에 대한 개개의 설명과 탈을 제작한 허도령에 관한 전설을 설명해 주었다. 사람들이 흔히 아는 각시탈에서부터 양반탈, 선비탈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부네, 초랭이, 할미, 이매, 중, 백정, 주지탈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아주 재미있었다.



 


자신은 주로 바보인 이매탈을 쓰고 공연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매탈을 쓰고 직접 연기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입담이 보통이 아니라는 생각에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더니, 몇 년 전 ‘전국사투리경연대회’에 3등 입상을 한 경력도 있고, 고등학생이던 16살부터 배워 하회별신굿탈놀이를 배워 군대시절을 제외하고도 십년 넘게 학습 중에 있다고 했다.



 


그는 “하회에는 예부터 내려오는 말에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에 류씨 배판이라는 말이 있다. 하회에는 처음에 허씨가 고려중엽에 이 마을에 들어와 터를 잡고 살았고, 이후 안씨가 그 다음, 고려 말에는 풍산 류씨가 들어와 지금의 터를 잡고 살고 있다. 탈의 제작자가 허도령이라는 전설로 보아 고려 중엽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라고 하회마을과 탈의 유래에 대해 말했다.



 


또한 “허씨들이 마을에 들어와 터를 잡고 살 때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우환이 계속되자 마을 사람들은 걱정이 대단했다. 어느 날 마을에 사는 허도령의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서 '지금 마을에 퍼지고 있는 재앙은 이 마을을 지켜주고 있는 신의 노여움 때문이라 일러주며 탈을 만들어 춤을 추면 신의 노여움이 풀리고 마을이 다시 평안을 찾을 것이다. 그러나 탈을 만드는 것을 아무도 모르게 하여야 하며 만일 누군가 엿보거나 알게 되면 부정이 타서 너는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게 될 것이다' 고 일러주었다.”라고 탈과 허도령에 관한 전설을 설명했다.



 


이에 “허도령은 그날부터 동네어귀 으슥한 곳에 움막을 짓고 탈을 제작하게 된다. 그러나 마을에는 허도령을 사모하는 처녀가 있었는데 도무지 허도령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연민의 정이 사무쳐 그만 허도령이 탈을 제작하는 탈막으로 다가가 엿보고 말았다. 그러자 뇌성벽력이 천지를 진동하며 허도령은 그만 그 자리에 피를 토하고 죽고 말았다. 허도령이 죽게 되자 처녀는 죄의식에 사로잡혀 그만 자결하게 되니 마을 사람들이 처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화산 중턱에 서낭당을 짓고 처녀를 성황신으로 받들어 매년 정월 대보름에 동제사를 올리고 있다.”고 전한다.



 


또한 “하회탈의 특징은 코와 눈, 주름살이 잘 조화되도록 제작되어 비록 한 면으로 고정된 가면을 통하여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을 표현해 낼 수 있다. 얼굴을 뒤로 젖히면 밝고 유쾌한 표정이 되고, 얼굴을 숙이면 보는 방향에 따라 슬픈 표정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턱을 분리하여 제작함으로써 대사 전달이 분명하며 말을 할 때마다 턱이 움직여서 표정의 변화를 다양하게 연출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하회탈에는 이 땅의 역사를 이어온 우리 민족의 숨결이 배어 있고 탈놀이에는 풍요다산을 기원하며 액을 막고 복을 맞이하는 조상들의 지혜로움을 느낄 수 있다.”라고 탈의 특징과 우수성을 전한다.


 


아울러 “양반탈의 인자함과 호방한 미소 뒤에 숨어있는 지배계급의 허세를 느낄 수 있고, 선비탈의 대쪽 같은 표정 이면에는 권력을 갖지 못한 억눌린 한이 서려있다. 중탈의 엉큼한 표정과 초랭이 탈의 장난 끼 어린 모습이나 이매탈의 바보스러운 표정은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낸다. 각시탈에서는 성황님의 위엄이 느껴지고, 부네탈에서는 애교를 느끼며, 할미탈에서는 한 평생 어렵게 살아온 서민들의 한(恨)이 서려있다.”고 개개 탈의 성격을 말했다.


 


또한 “하회별신굿은 매년 지내는 동제와 달리 5년~10년 또는 신탁이 있을 때 마다 열렸다. 이는 마을을 지켜주는 신의 힘도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 영험이 줄어들게 되고 이렇게 되면 마을에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고 믿었다. 풍년이 들지 않고 흉년이 들어 거둘 곡식이 없고, 돌림병이 돌아 마을 사람들이 죽게 되는 우환이 닥치면 이는 곧 신의 영험이 줄어들었거나 신의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라 생각하여 신의 힘을 북돋워 주며 노여움을 풀기 위하여 특별한 큰굿을 하게 되는데 이것을 별신굿이라 한다. 특히 하회의 별신굿은 무당을 부르지 않고 마을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큰굿을 하는 대동행사였다.”라고 재미있게 말했다.


 


하회탈처럼 생긴 입담 좋은 서른 두 살의 노총각인 류 선생에게서 탈에 대한 설명과 유래 등을 들은 후, 모두가 크게 원을 그리며 둘러서서 탈춤을 따라 배웠다. 처음 하는 몸짓이라 대부분 서툴고 부끄러워 웃음만 나왔지만, 탈을 한번 쓰면 천당에 갈 수 있다는 말에 다들 열심히 배웠다.


 


실제로 보통 사람은 평생 한번 탈을 써보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었다고 한다. 하회마을의 진산(鎭山)인 화산의 정기를 받은 자 만이 탈을 쓰고 굿판을 벌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에게 탈을 쓴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었다. 양반이 아닌 노비나 백성 스스로가 하회마을을 지키는 주인이 되고 신이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오마이뉴스_김수종]

[김수종 기자 ]

위 URL을 길게 누르면 복사하실 수 있습니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카오스토리로 보내기
  • URL 복사하기
<저작권자ⓒ서울문화인 & sculturein.com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댓글0
이름
비밀번호
신문사소개 | 광고안내 | 제휴·광고문의 | 기사제보 | 다이렉트결제 | 고객센터 | 저작권정책 | 개인정보취급방침 | 청소년보호정책 | 독자권익보호위원회 |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 RSS top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