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 일제가 훼철한 경복궁 월대 복원 위한 단서 확보... 오는 10월까지 복원하겠다.

광화문 월대 복원을 위해 진행 중인 발굴조사의 성과, 복원계획 공개
기사입력 2023.04.25 00:00 조회수 501

위 URL을 길게 누르면 복사하실 수 있습니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카오스토리로 보내기
  • URL 복사하기
  • 기사내용 프린트
  • 기사 스크랩
  • 기사 내용 글자 크게
  • 기사 내용 글자 작게
그림 1. 광화문 월대 유적 전경(원본).JPG
광화문 월대 유적 전경

 

 

 

[서울문화인] 20191, 서울시와 문화재청은 현재 단절된 광화문광장을 북악산~한강으로 이어지는 역사경관축을 회복하겠다는 주요 골자로 한 광화문 프로젝트를 발표하면서 지난해 8, 새로운 광화문광장은 세종문화회관 앞 차로는 광장으로 편입돼 광장 규모가 3.7배로 확장되고, 해치광장 등 세 곳으로 단절돼 있던 지하공간은 하나로 통합되어 시민을 위한 또 다른 광장이 생겼다. 특히 광장 전체 면적의 약 4분의1에 해당하는 9,367가 녹색 옷을 입고 공원 형태의 광장으로 변모하였다.

 

당시 광화문광장 뿐만 아니라 광화문 일대의 훼손된 역사를 복원하고자 광화문 앞 월대를 복원해 경복궁의 위용을 되살리고 월대 앞을 지켰던 해태상은 원래 위치를 찾아 광장 쪽으로 이동시킨다는 계획을 밝혔다.

 

 

국립 민속박물관 제공 헤르만산더(00156018).jpg
1906~7년 광화문 [국립 민속박물관 제공+ 헤르만산더]

 

 

425, 문화재청(청장 최응천)은 지난해 9월부터 국립서울문화재연구소가 광화문 월대의 복원정비를 위해 진행 중인 발굴조사의 성과와 향후 복원계획을 언론에 공개하였다.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먼저 월대 위로 일제강점기 때인 1917년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전차 철로 일부가 발견되어 이미 시민에게 공개된 바가 있다. 이 철로는 1966년 세종로 지하도가 생기면서 땅속에 묻힌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후 문화재위원회는 전문가 회의와 논의를 거쳐 철로의 일부 구간을 경기 의왕시 철도박물관으로 옮겨 보존하기로 결론을 내렸다.이날 문화재청 출입 기자를 대상으로 한 공개에서는 광화문 월대를 중심으로 설명회가 진행되었다. 밝혀진 월대는 동·서 외곽에 잘 다듬어진 장대석(길이 120~270cm, 너비 30~50cm, 두께 20~40cm)을 이용하여 2단의 기단을 쌓고, 그 내부는 서로 다른 성질의 흙을 교차로 쌓아 주변보다 높게 대를 만들었음이 확인되었다. 월대의 남쪽에는 장대석을 이용하여 계단을 조성하였는데, 그 중 어도(御道, 임금이 지나도록 만든 길)와 연결되는 중앙부는 소맷돌(계단의 좌·우측 양단을 장식하거나 마감하기 위해 놓이는 경사 부재)을 이용하여 동·서 계단과 분리하였다. 특히, 어도계단지의 경우 전차선로에 의해 일부 훼손되었으나 소맷돌을 받쳤던 지대석(계단면석 또는 소맷돌을 놓기 위해, 지면에 놓이는 받침 돌)이 확인되어 월대의 원형을 복원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림 3. 월대 유적 현황(원본).JPG
월대 유적 현황

 

 

그림 3. 월대 유적 현황.jpg
월대 유적 현황

 

월대의 어도와 동편 기단  01.jpg
월대의 어도와 동편 기단

 

 

 

월대(越臺, 月臺)는 궁궐의 정전과 같이 중요 건물에 넓게 설치한 대()로 경복궁 근정전, 창덕궁 돈화문, 덕수궁 대한문 등에서 확인되는데 궁궐 정문에 난간석을 두른 경우는 광화문 월대가 유일하다고 한다. 경복궁 영건일기(景福宮 營建日記)의 기록과 1890년대 이후로 전해지는 사진자료에 따르면 광화문 월대는 길게 다듬은 장대석을 이용한 기단석과 계단석, 그리고 난간석을 두르고 내부를 흙으로 채워 만든 건축구조물이다.

 

 

국사편찬위원회 제공_1923년경 SJ0000012018.jpg
1923년경 월대에 보이는 난간석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그러나 광화문 월대는 태조(1395, 태조 4) 때 건립 당시에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종실록 권 51, 1431329일에 따르면 <예조 판서 신상이 아뢰기를, “광화문(光化門) 문밖에 본래 섬돌이 없어서 각품 관리들이 문 지역까지 타고 와서야 말에서 내리오니, 이는 매우 타당치 못한 일입니다. 또 이 문은 명나라 사신이 출입하는 곳으로서 돌을 채취하여 계체(階砌)를 쌓고, 양쪽 곁으로 둘레를 쌓아야 하며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바야흐로 농사철에 접어들었는데, 어찌 민력(民力)을 쓰겠는가.” 하고 윤허하지 아니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바탕으로 광화문 월대는 소실된 지 약 270년이 흐른 1867(중건공사 개시: 1865, 중건공사 완료: 1867년 말)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의지로 다시 중건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파악되었다. 경복궁 영건일기1866년 고종 333(임술)자의 기록에 <광화문 앞에 월대를 쌓았다. 모군이 궁 안에 쌓아둔 잡토를 지고 왔는데, 실로 4만 여 짐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발굴된 월대 주변에는 민가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소실되면서 270여 년 동안 경복궁이 방치되면서 경복궁 앞 대로에는 육조는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의정부 앞에도 민가가 들어서게 되었다고 한다.

 

 

고종 대에 경복궁 중건 전 민가의 흔적(흰색 원).jpg
고종 대에 경복궁 중건 전 민가의 흔적(흰색 원)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원(원장 김연수)에 따르면 이번 조사를 통해 고종년간 월대 축조 이후 크게 4단계의 변화과정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고 밝혔다. 1단계에서는 월대 축조 당시로 남쪽에 경계가 나누어진 3개의 계단이 존재했으며, 당시 월대의 평면형태는 역철자형이었다. 2단계에서는 중앙의 어도계단지가 경사로로 변화되고, 3단계에서는 경사로의 범위가 확장되고 계단이 동·서 외곽으로 축소 변형되었으며, 이 시기에 처음으로 단선(외줄) 형태의 전차선로가 설치됐다. 4단계에서는 전차선로의 복선(겹줄)화로 월대가 파괴되면서 난간석 등이 철거되고 광화문의 이건과 함께 도로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경복궁 월대는 1923년 사진에는 등장하지만 이후 전차선로의 단선 및 복선화로 월대가 훼철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 외에도 기단석 하부에 여러 매의 지대석을 놓고 적색점토로 보강한 기초시설, 철편과 점토, 석회를 이용한 장대석 사이의 수평맞춤, 장대석의 밀림 방지를 위해 점토와 깬 돌을 섞어 보강한 뒷채움방식 등을 통해 당시 조선시대의 건축기법도 확인하였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본부장 정성조)는 이번 발굴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1920년대에 훼철된 이후 동구릉 등에 이전돼 있던 월대 부재(난간석, 하엽석 등)를 재사용하고, 문화유산수리장인 등의 전문가와 함께 전통재료·기법을 적용하여 월대 복원하여 오는 10, ‘광화문 월대 복원 기념행사를 궁중문화축전 등과 연계하여 개최할 예정이라 밝혔다.

 

 

광화문 월대 복원 예시도.jpg
광화문 월대 복원 예시도, 최초 해태상은 고종원년에 세워진 월대 앞쪽에 설치될 계획이라 밝혔지만 공개된 복원 예시도에는 해태상이 현재 위치로 보여지고 있다. 이에 복원 시 도로 상황을 고려하여 월대 앞쪽으로 이전 될 것이라 밝혔다.

 

 

   

또한, 서울시와의 업무협조체계를 지속 유지하여 월대 주변부 정비사업(삼군부 및 의정부 터 일부)과 함께 현재 분리되어 있는 동십자각도 향후 연결하는 복원도 진행할 것이라 밝혔다. [허중학 기자]

 

 

 

 

[허중학 기자 ostw@naver.com]

위 URL을 길게 누르면 복사하실 수 있습니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카오스토리로 보내기
  • URL 복사하기
<저작권자ⓒ서울문화인 & sculturein.com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댓글0
이름
비밀번호
신문사소개 | 광고안내 | 제휴·광고문의 | 기사제보 | 다이렉트결제 | 고객센터 | 저작권정책 | 개인정보취급방침 | 청소년보호정책 | 독자권익보호위원회 |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 RSS top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