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해시계 ‘앙부일구’는 왕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세종대왕역사문화관, ‘조선시대 해시계와 앙부일구’전
기사입력 2020.05.07 11:35 조회수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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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부일구 01.jpg
앙부일구(보물 제845호/복제품), 조선시대, 청동, 지름 24.3cm, 높이 10cm, 세종대왕역사문화관 소장

 

 

 

[서울문화인] 세종대왕역사문화관에서 재개관과 함께 오는 628일까지 조선시대 해시계와 앙부일구전을 진행한다.

 

영화 천문에서 세종은 장영실에 명하여 천체관측기구인 간의를 만들게 하였지만 적대적인 신하들이 중국 사신에게 이를 고하여 결국 부셔버리게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영화뿐만 아니라 뮤지컬 ‘1446’에도 이런 내용이 나온다. 그럼 왜 그런 것일까? 당시 천문과 시간은 천자만이 하늘의 섭리를 알아야 하는 것이었다. 제후국인 조선의 왕에게도 그것은 예외가 아니었다.

 

그럼 과거 절기(節氣)와 시간이 중요했을까. 농업사회에서 농사를 짓는데 절기와 시간은 굉장히 중요하다. 지금도 품종에 따라 씨를 뿌리는 시기가 다 다르고 절기에 맞춰서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짓고 수확시기도 결정한다. 그것을 미리 안다는 것은 백성을 통치하는 하나의 수단이 다. 또한 그것을 정확하게 산정하여 알려 수확을 늘리게 한다는 것은 백성들의 생존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애민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앙부일구의 제작자는 불분명하지만 1434(세종16) “(세종이) 이순지(李純之)에게 명해 의상(儀象)을 교정(校正)하게 하니, 곧 지금의 간의(簡儀규표(圭表대평(大平 또는 天平현주(懸珠앙부일구(仰釜日晷)와 보루각(報漏閣흠경각(欽敬閣)은 모두 이순지가 세종의 명을 받아 이룬 것이다라는 세조실록(世祖實錄)의 기사를 참조할 때, 이순지가 앙부일구를 비롯한 각종 의상 제작에 책임자로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종 때 제작된 앙부일구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현존하는 앙부일구는 모두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이다. 문헌기록을 통해서 볼 때 조선 후기의 앙부일구는 세종 때의 그것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시각 표시를 12지신의 동물그림 대신 글자로 했다는 점, 조선 후기 시헌력(時憲曆)으로 역법이 개정됨에 따라 시제(時制)가 기존의 1100각법에서 96각법으로 변경되어 시각 눈금이 달라졌다는 점, 그리고 주천도수가 365 1/4도에서 360도로 바뀌면서 한양의 북극고도가 달라졌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현재 여러 개의 앙부일구가 존재하고 있다. 휴대용 앙부일구까지 포함하면 10여 개 정도가 남아 있다.

 

이번 전시는 절기와 시간을 동시에 알 수 있는 해시계이자 세종대왕의 자랑스러운 과학 문화재인 앙부일구를 관람객들에게 소개하고자 마련되었다. 전시는 총 3부로, 1부는 <평면 해시계의 역사>, 2부는 <앙부일구의 역사와 구조>, 3부는 <조선후기 휴대용 앙부일구의 제작자들>로 구성되었다.

 

 

휴대용 앙부일구(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64호).jpg
휴대용 앙부일구(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64호), 강문수, 1908년, 상아, 가로 3.1cm, 세로 7.2cm, 높이 3.8cm,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상아제 휴대용 앙부일구.jpg
상아제 휴대용 앙부일구, 강익수, 1901년, 상아, 가로8.5cm, 세로4.5cm, 높이2.5cm, 세종대왕역사문화관 소장

 

 

1, <평면 해시계의 역사>에서는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가장 먼저 사용된 평면 해시계에 대한 소개글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해시계인 6~7세기경의 신라 시대 해시계 잔편(殘片)’, 조선 시대 사용한 휴대용 평면 해시계를 전시하고 있다.

 

2, <앙부일구의 역사와 구조>에서는 솥뚜껑을 뒤집어 놓은 듯한 모습을 한 해시계라는 뜻의 앙부일구(仰釜日晷)를 선보인다. 세종대왕은 우리나라 최초의 공중(公衆) 해시계인 앙부일구를 만들어 백성들이 시간을 읽을 수 있도록 종묘와 혜정교(惠政橋, 지금의 서울 종로1)에 설치했다. 세종대왕 때 제작된 앙부일구는 남아 있지 않아 전시장에서는 17세기 이후에 제작된 앙부일구(보물 제845, 국립고궁박물관 소장)의 복제품을 공개한다.

 

3, <조선후기 휴대용 앙부일구의 제작자들>에서는 조선 후기 해시계로 대표적인 휴대용 앙부일구가 전시되었다. 강윤(姜潤, 1830~1898)과 동생 강건(姜湕, 1843~1909)은 조선 후기 해시계 제작 가문으로 유명한데, 강건의 두 아들인 강익수(姜益秀, 1871~1908)와 강문수(姜文秀, 1878~1931) 또한, 가문의 시계 제작 전통을 이어 나갔다. 이번 전시에 출품된 <상아제 휴대용 앙부일구>(세종대왕역사문화관 소장)는 강익수가 만든 것이고, <앙부일구>(서울역사박물관)는 강문수가 제작한 것이다. 전통사회에서 시계제작은 주로 중인 신분이 하는 데 반해, 이들 집안처럼 고위층 양반 가문에서 제작을 주도한 점이 특별하다. [김진수기자]

 

 

[김진수 기자 ost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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