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왜 태조 건원릉 봉분은 억새가 덮고 있으며, 한식에 예초를 진행할까.

기사입력 2020.04.07 20:09 조회수 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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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인] 지난 5일 한식(寒食)을 맞아, 구리 동구릉(사적 제193) 내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봉분을 덮고 있는 억새를 자르는 청완 예초의’(靑薍 刈草儀)를 진행하였다.

 

다른 왕릉은 봉분의 사초(잔디)가 자라면 수시로 예초하여 연7-8회 정도 초를 하지만 예로부터 건원릉 억새는 1년에 한번 한식날 예초(풀베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이 행사는 조선왕릉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이듬해인 2010년부터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매년 한식날에 일반 시민들과 함께 억새를 베는 청완 예초의를 거행하고 있다.

 

 

건원릉 봉분을 덮고 있는 억새를 자르는 ‘청완 예초의’.jpg
건원릉 봉분을 덮고 있는 억새를 자르는 ‘청완 예초의’

 

 

 

청완 예초의는 봉분의 억새를 베는 예초의’, 1년간 자란 억새를 제거했음을 알리는 고유제(告由祭, 중대한 일의 이전이나 이후에, 일에 대한 사유를 고하는 제사)’, 고유제가 끝난 다음 제향음식을 나누어 먹는 음복례’(飮福禮) 순으로 진행하는데 올해는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일반 시민의 참여를 제한하고 의식을 최소화하여 자체적으로 억새를 베는 예초의만 진행하였다.

 

2019 진행된 청완예초의 고유제 2.jpg
2019 진행된 청완예초의 고유제

 

 

2019 진행된 청완예초의 음복례.jpg
2019 진행된 청완예초의 음복례

 

 

 

그렇다면 왜 푸른 잔디가 있는 여느 왕릉들과는 달리 태조의 건원릉은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억새로 봉분이 덮여있을까, 또한 다른 능과 달리 한식에 예초의를 진행하는 것일까.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에 따르면 태조(太祖, 1335~1408)의 유언에 따라 고향인 함흥의 억새를 옮겨와 봉분을 조성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인조실록(인조 7319)에 따르면 태조의 유교(遺敎)에 따라 청완(억새)을 사초로 썼다는 기록 등장한다. 또한, 건원능지(1631, 능상사초편)에는 태조의 유명(遺命)으로 함흥에서 옮겨왔다는 기록과 한식 때 예초하는 기록 등장한다.

 

인조실록 20, 인조 7(1629년 명 숭정(崇禎) 2) 319, 홍서봉이 건원릉의 사초에 대한 기록이 있다. 동경연 홍서봉(洪瑞鳳)이 아뢰기를, “건원릉 사초를 다시 고친 때가 없었는데, 지금 본 릉에서 아뢰어 온 것을 보면 능 앞에 잡목들이 뿌리를 박아 점점 능 가까이까지 뻗어 난다고 합니다. 원래 태조의 유교(遺敎)에 따라 북도(北道)의 청완(억새)을 사초로 썼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다른 능과는 달리 사초가 매우 무성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무 뿌리가 그렇다는 말을 듣고 어제 대신들과 논의해 보았는데, 모두들 나무뿌리는 뽑아버리지 않으면 안 되고, 사초가 만약 부족하면 다른 사초를 쓰더라도 무방하다고들 하였습니다.” 이에 한식(寒食)에 쑥뿌리 등을 제거할 때 나무뿌리까지 뽑아버리지 않고 나무가 큰 뒤에야 능 전체를 고치려고 하다니 그는 매우 잘못된 일이다. 지금이라도 흙을 파서 뿌리를 잘라버리고 그 흙으로 다시 메우면 그 뿌리는 자연히 죽을 것이다. 예로부터 그 능의 사초를 손대지 않았던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였던 것이니 손을 대서는 안 된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사초를 함흥에서 옮겨왔다는 기록과 한식에 사초(청완)를 베는 기록은 건원릉지의 능상사초 편에 이르길 “(국역) 옛날 봉릉을 할 때 함흥에서 옮겨왔다고 한다.(전하기로는 태조의 유명이라고 한다.) 한식 때 으레 사초(억새)를 자르면 여름에 새싹이 돋아 나오고 가을에 이삭을 맺으며 서리가 내릴 때에 시들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하지만 건원릉이 억새로 덮힌 것에 대한 이야기는 다양하다. 이성계가 어렸을 때 군사 훈련 놀이를 하다가 늦게 온 어떤 과부의 자식을 죽이게 되자, 이를 알게 된 동네 사람들이 이성계를 죽이려고 하였다. 이때 이성계는 억새밭에 숨어서 살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뒤로 태조 이성계는 억새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죽을 때 고향 함흥에 있는 억새로 무덤을 덮어 줄 것을 소원하였다. 그래서 하루 만에 억새를 옮겨와 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 다른 야사는 태조가 본래 신덕왕후가 있는 정릉에 같이 묻히기를 바랐는데, 당시 태종은 정릉 주변의 백 보 밖까지는 집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하였을 정도로 신덕왕후를 미워하였다. 그런 아들이 태조의 뜻을 들어 줄리가 만무하다 생각하였고, 태종에게 조상들이 묻혀 있는 함흥 땅에 묻어 달라 유언하였다. 하지만, 태종은 초대 왕이었던 태조를 한양과는 멀리 떨어진 함흥에 묻는다면, 제사를 지낼 때 문제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고, 그렇다고 유언을 거스를 수는 없다 생각하였기에 함흥에서 가져 온 흙과 억새를 덮은 봉분을 통해 타협점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덕왕후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태종 이방원은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강등시켰고 능은 묘로 격하되어 일반 무덤과 비슷해졌다. 또한 정릉의 일부 석조물들을 홍수로 유실된 광통교를 다시 세우는 데 갖다 쓰고, 정자각도 없애버렸다. 이는 모든 사람들이 신덕왕후의 석조물을 밟고 지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한 의도였다. 지금도 신덕왕후의 능의 일부 석조물은 청계천 광통교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약 200년 후 1669(현종 10) 송시열의 상소에 의해 신덕왕후는 왕비로 복위되었고, 무덤도 왕후의 능으로 복원되었다.

 

 

청계천 광천교.jpg
청계천 광통교

 

 

이 외에도 임진왜란 때 왜장이 건원릉을 없애려고 불을 놓으면 불이 그냥 꺼지고, 건원릉 비를 칼로 찌르자 비가 피를 흘리면서 장군이 되고, 무덤을 덮은 억새와 인근 나무들이 군인으로 변해 왜군들을 물리쳤다는 전설이 있다. 이런 신이한 능력 때문인지 6·25 전쟁 때도 건원릉은 포격을 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건원릉은 조선의 초대 왕이었던 태조의 왕릉이었던 만큼 많은 신경을 썼다. 조선 초기 왕릉의 기본 양식은 고려의 왕릉에서 따온 것이 많았는데, 이 중 가장 잘 정비되어 있었던 공민왕의 현정릉 양식을 따랐다. 다만, 세부적으로는 석물의 배치와 장명 등의 조형이 약간의 변화를 보였고, 봉분 주위의 곡장을 두르는 양식이 조선시대에 새로 추가되었다. 왕릉 주변의 석물 조형은 남송 말기의 형식을 도입하였다고 한다. 이 외에 석호와 석양의 배치, 장명등, 난간석주는 조선시대에 와서 새로 변하였고, 이러한 양식은 국조오례의를 통해 정비될 때까지 이어지게 된다. [허중학 기자]

 

 

 

 

 

 

[허중학 기자 ost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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