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궁중현판>,<만인의 청원, 만인소> 등재로 19건의 세계기록유산을 보유

기사입력 2018.06.04 15:33 조회수 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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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인]문화재청(청장 김종진)이 지난해 8월 등재 신청한 <조선왕조 궁중현판><만인의 청원, 만인소>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 아시아태평양 지역목록으로 등재되었다.


 


지난 5월 28일부터 31일까지 광주광역시에서 열린 제8차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아시아태평양 지역위원회(MOWCAP, Memory of the World Committee for Asia and the Pacific) 총회에서 심사를 거쳐 최종 등재가 결정되었다.


 


이번에 등재된 <조선왕조 궁중현판>은 글씨나 그림을 나무판 등에 새겨 조선 궁궐건물에 걸어놓은 것으로,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경복궁을 지은 1395년부터 궁궐에 걸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 중 등재 신청을 통해 등재된 현판은 16세기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제작된 현판 중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770점이며, 경복궁과 창덕궁 등 5대 궁궐(宮闕)과 종묘 등 사묘(祠廟) 공간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간취천심수(창20892)_선조어필_내 마음의 근심은 가늠하기 어렵다는 뜻


건구고궁(창20653)_영조어필_임금이 살았던 옛 집을 뜻함 - 복사본


교월여촉(창20528)_숙종어필_달이 촛불처럼 밝다는 뜻


 


 


조선왕조 궁중현판은 건물의 기능과 성격을 알려줄 뿐 아니라 문학, 서예, 장식, 건축예술이 집약된 기록유산으로서 조선왕조가 추구하고자 했던 정신세계와 가치관이 반영되어 있다. 이에 역사, 건축예술, 조선 시대 동아시아 국가 간 문화교류 연구 자료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조선왕조 궁중현판은 해서(楷書), 전서(箭書), 초서(草書) 등 여러 서체를 망라하고 있는데, 특히 현판에만 쓰인 액체(額體)라는 서체를 사용한 점이 매우 특징적이다. 이 액체는 한국, 중국, 일본 등 한자문화권 중 우리나라에서만 사용되었으며, 먼 거리에서도 명확하게 잘 보이도록 굵은 필획으로 현판에 꽉 찬 느낌을 주며, 글자가 뚜렷하고 분명하게 보이도록 한 서체이다. 그리고 현판의 글씨는 왕과 세자, 명필, 문인과 학자들이 남긴 것으로 당시의 시대정신과 가치관 예술혼이 담겨 있으며, 시기별 유행하였던 서체와 필법을 가늠해볼 수 있는 미술사적 가치도 지니고 있다.


 


또한, 조선왕조 궁중 현판은 궁궐 건물에 걸려있던 것으로 각 건물의 공간적 성격에 따라 내용과 크기, 장식 등을 달리 제작하였기 때문에 조선왕조 궁궐 건축공간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쳐 고의적인 훼손 등으로 사라진 건물들은 최근 점차적으로 복원을 시도하고 있다. 이때 유구(遺構)를 통해 건물의 규모는 알 수 있고 현판을 통해서는 건물의 성격과 양식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에 궁궐의 온전한 복원의 근거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만인의 청원, 만인소>는 조선 시대 지식인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연명해서 왕에게 올린 청원서로서, 1792년 처음 시작되어 총 7번의 사례가 있었다. 이번에 세계기록유산 아태지역목록으로 등재된 만인소는 상소 원본이 남아있는 1855사도세자 추존 만인소1884복제 개혁 반대 만인소’ 2종이다.


 


만인소는 형태적으로도 100여 미터에 달하는 대형 기록물이다. <1855년 만인소>194명이 연명하여, 1.11m, 길이 96.5m, 무게 16.6kg에 달하고, <1884년 만인소>8,849명이 연명하여, 1.02m, 길이 100.36m, 무게 8.3kg에 달한다.


 


 


만인의 청원, 만인소(사도세자 추존 만인소)


사도세자_상소본문


 


1855<사도세자 추존 만인소>로 불리는 만인소는 사도세자(1735~1762)는 왕위를 계승할 세자였지만, 반대파의 정치적 모함으로 뒤주에 갇혀 죽은 왕자이다. 아버지인 영조가 직접 이 형의 집행을 명함으로써,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비운의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조선의 많은 재야 지식인들은 당시 권력을 잡은 집권층의 음모에 의해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한 이후 재야 지식인들은 사도세자가 죽은 원인을 밝히고 신원해야 한다는 상소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첫 번째 만인소인 <1792년 만인소>로 표출되었다. 1855년 만인소는 이러한 연장선에서 사도세자를 왕의 지위로 복권시키고, 사도세자를 죽인 집권층에 대해 정치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청원 내용을 담고 있다.


 


 


만인의 청원, 만인소(복제개혁반대 만인소)


 


 


1884<복제 개혁 반대 만인소>로 불리는 만인소는 조선의 전통 복식을 서양문물의 영향을 받은 복식으로 개혁하려는 중앙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청원서이다. 유학자들에게 복식은 유교적 신념과 진정성과 관련된 문제였다. 현 시대의 관점에서는 시대착오적일 수 있지만, 당시 재야 지식인들은 유교 질서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전통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이들은 이러한 정책이 중앙정부에서 일방적으로 강요되었던 사실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정책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이처럼 만인소는 수천 명이 참여한 집단청원 운동으로 조선 시대 지식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공론 정치의 결과물이며, 전근대시기임에도 현대적 개념의 여론 형성과 민주적 절차가 중요하게 작동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이번 등재를 통해 한국은 훈민정음(1997), 조선왕조실록(1997), 직지심체요절(2001), 승정원일기(2001), 조선왕조의궤(2007), 해인사 대장경판과 제경판(2007), 동의보감(2009), 일성록(2011), 518 관련 기록물(2011), 난중일기(2013), 새마을운동기록물(2013), 한국의 유교책판(2015), KBS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2015), 조선왕실 어보와 어책(2017), 국채보상운동기록물(2017), 조선통신사기록물(2017) 등 기존의 세계기록유산 국제목록 16건과 한국의 편액(2016) 그리고 올해 등재된 <조선왕조 궁중현판><만인의 청원, 만인소> 등 세계기록유산 아태지역목록 3, 19건의 세계기록유산을 보유하게 되었다. [김진수 기자 ostw@naver.com]


 


 


 


 


 


 


 

[서울문화인 기자 ost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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