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인]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이하는 4월 11일, 을미의병 시 안동지역 의병장으로 활약한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 1825-1912)의 <척암선생문집책판(拓菴先生文集冊板)> 1장이 독일에서 환수하여 국내로 들여와 공개되었다.
척암 김도화는 영남에서 활동한 조선 말기의 대학자이자 의병장이다. 한국 독립운동의 산실인 임청각(臨淸閣) 문중의 사위 가운데 한 분으로, 석주 이상룡(李相龍, 1858-1932)의 종고모부이기도 하다. 척암은 퇴계학파의 학통을 이어받아 학문에 힘쓰며 후진을 양성하는 한편, 1895년의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을미의병이 촉발되자 통문을 각지로 보내고 1896년 1월 안동의진(安東義陣)의 결성을 결의했다.
같은 해 3월에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지휘부를 조직하고 격문을 발송하여 의병 참여를 호소하였다. 마침내 상주 태봉에 주둔한 일본군 병참기지를 공격하여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비록 화력의 열세로 패퇴하기는 했지만 이른바 태봉 전투는 이후 전개되는 무장 항일독립운동의 기반을 조성한 것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안동의진이 해산하고 을사늑약을 거쳐 한일강제병합에 이르자, 척암은 자택의 대문에 ‘합방대반대지가(合邦大反對之家)’라고 써 붙이고 상소를 올리는 등 문필로 일제의 부당함을 끊임없이 호소하였다. 척암은 심지어 통감부에 보낸 글에서 “스스로 목매어 죽는 것보다는, 싸우다가 적의 칼날에 죽는 것이 차라리 낫다.”며 항일의 의지를 불태웠다. 조국의 독립을 위한 그의 활동은 높이 평가되어 1983년 대한민국 건국포장에, 1990년에는 대한민국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척암선생문집」은 척암이 생전에 남긴 글을 모아 그의 손자 김헌주(金獻周) 등이 1917년 편집·간행한 것으로, 본집 39권 19책, 속집 13권 6책으로 구성되었으며, 인출된 문집은 현재 진흥원과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이번에 돌아온 <척암선생문집책판>(책판 크기:19.1cm×48.3cm)은 「척암선생문집」을 찍어낸 책판 1,000여 장 중 하나이며, 권9의 23~24장에 해당한다. 척암 선생의 책판은 현재 20장만이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조현재)에서 관리되고 있으며, 이번에 매입한 책판까지 합치면 총 21장이 전해지게 되었다. 진흥원에 소장된 <척암선생문집책판>은 2015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유교책판’의 동일한 책판의 일부이기도 하다.
한국국학진흥원은 2019년 2월, 국외 경매에 출품된 한국문화재 사전점검(모니터링) 중, 독일의 한 작은 경매에 나온 이 책판을 그동안 국외소재문화재재단과 긴밀히 협의하여 현지 매입을 추진하였다. 이 책판은 오스트리아의 한 가족이 오래 전부터 소장했던 것으로, 양쪽 마구리(손잡이)는 빠져 있었고 한쪽 면에는 글자를 조각한 부분에 금색 안료를 덧칠한 상태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유물 상태는 양호하여, 판심(版心)을 통해 『척암선생문집』의 9권 23~24면, 「태극도설」부분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과정에 온라인 게임회사 라이엇게임즈(Riot Games, 한국대표 박준규)의 도움이 컸다. 라이엇게임즈는 2012년부터 문화재청과 문화재지킴이 협약을 맺고 한국 문화유산 보호와 지원을 위한 사회공헌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누적 기부금은 현재 50억 원을 넘어섰다.
라이엇 게임즈는 이 외에도 재단과 함께 미국에 있었던 조선 불화 ‘석가삼존도’(2014), 프랑스 경매에 출품된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2018) 환수와 같은 국외 한국문화재 환수 사업, 주미대한제국공사관 복원 사업을 추진해 왔으며, 이번 책판의 환수로 또 하나의 소중한 결실을 맺게 되었다.
라이엇게임즈 코리아 오디토리움(강남구 삼성동 소재)에서 열린 기증식에서 라이엇게임즈 박준규 대표는 “우리문화재 찾기에 동참하게 되어 기쁘다. 앞으로도 더 많은 사례를 만들어 가겠다.”는 짧은 소감을 밝혔다.
척암 선생의 종손 김동호 씨는 “어릴 적 보던 (책판)을 50년 만에 보게 되어 기쁘다. 천여 점 중에 일부라도 찾게 되어 아쉬움 달래며 영광이다.” 밝혔다. 하지만 유출 시기에 대해서는 “1960년대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는 본 기억이 나는데 어떻게 유출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밝히면서 이 책판의 제작에 대해서는 고향 안동이 아닌 영천으로 이사를 갔었을 때 제작된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한편, 국학진흥원에 따르면 오스트리아의 소장자로부터 다른 책판의 유무에 대해 확인을 했으나 더 이상 다른 책판은 확인할 수 없었다고 한다. [허중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