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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 중앙지역(C지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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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 건물지와 부속시설) |
[서울문화인] 지난해 12월 12일 고유제를 시작으로 조사한 사적 제16호 ‘경주 월성(慶州 月城, 이하 월성)’ 중앙지역(57,000㎡)의 시굴조사 성과를 공개했다. 이번 조사는 1914년 일제가 남벽 부근을 처음 파헤친 지 100년 만에 우리 손으로 실시한 최초의 내부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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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현장 |
이번 시굴조사는 지하 매장구조의 전반적인 양상을 파악하고자 실시하였는데 시굴조사를 통해 현재까지 확인된 건물지와 담장의 흔적들은 유적 내 최상층에 위치하고 있으며, 삼국 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 전반에 걸친 토기와 기와들이 출토되는 것으로 볼 때 통일신라시대 월성의 마지막 단계의 모습일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이다.
조사지역에서는 기단, 초석, 적심 등 건물지 6동과 담장 12기 등이 확인되었으며, 이 중 정면 12칸, 측면 2칸의 3호 건물지(28m×7.1m)는 적심 위에 초석을 올렸고 담장과 배수로가 딸려있음이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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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기류 일괄 |
유물은 고배, 병, 등잔, 벼루, 막새기와, 귀면기와, 치미 등 통일신라시대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토기에는 ‘井’, ‘口’자 형태의 음각기호가 새겨진 것도 있고, 월성의 해자와 안압지에서 이미 발견된 적이 있는 ‘儀鳳四年 皆土(의봉4년(679년) 개토)‘, ’習部(습부)‘, ’漢(한)‘자명의 평기와도 출토 되었다.
백여 점이 넘는 토기 가운데 양호한 개체는 56점 정도로 기종은 고배, 뚜껑, 호, 병, 합, 완, 등잔, 벼루, 배 등 다양하게 확인되었다. 이 토기류는 주변의 월성해자, 분황사, 동궁과 월지에서 출토된 유물 양상과 유사하며, 6세기 중엽부터 통일신라시대 전반에 걸쳐 확인되는데 특히 8세기 초~중엽의 토기들이 가장 많은 것으로 판단했다.
유구 최상층, 지표 하 40cm까지에서 출토된 와전류는 수막새, 암막새, 귀면기와, 치미, 평기와 등 기와를 비롯하여 전돌이 출토되었다.
삼국시대 신라와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구분되는 수막새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이 많은데 삼국시대 수막새는 모두 연화문인데 반해 통일신라시대 수막새는 꽃잎이 내외로 중복되어 있는 중판, 꽃잎과 보상화문이 중복되어 있는 혼판, 꽃잎이 12~16엽인 세판이 주로 출토되었다. 이 외에도 가릉빈가문 수막새, 사자문 수막새가 소량 확인되었다.
암막새는 당초문이 대부분이고 비천문 1점이 확인되었다. 이 외에도 귀면기와가 소량, 곱새기와, 박공기와, 착고, 치미편이 1점씩 확인되었다. 출토된 와전류의 제작 시기는 대체로 7세기 전반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였던 것으로 판단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이번 성과를 토대로 월성 정밀발굴조사의 전환을 오는 20일 개최될 문화재위원회에 부의할 예정이다. 또한, 발굴조사와 최신 ICT(정보통신) 기술을 활용한 디지털기록화연구(사진학·영상공학·측량학), 성벽 축조공법 연구(토목공학), 절대연대 연구(물리학), 고대 지역생태환경연구(지리학·생물학), 고대 토지이용전략 연구(지형학·도시공학) 등 다양한 학제 간 융합연구가 병행될 계획이라 밝혔다.
월성은 신라 천년 수도의 궁성(宮城)으로, 서기 101년 파사왕(婆娑王)이 처음 쌓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특히 삼국유사에 신라의 국보였던 전설의 피리 ‘만파식적(萬波息笛)’이 보관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을 만큼, 오래전부터 국가의 중요시설로 알려져 있다.
파사왕이 월성을 쌓다(1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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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 권34 잡지 제3 지리1 |
婆娑王二十二年 於金城東南 築城
파사왕(婆娑王) 22년(101)에 금성 동남쪽에 성을 쌓아
號月城 或號在城 周一千二十三步
월성(月城) 혹은 재성(在城)이라고 불렀는데, 둘레가 1천 23보였다.
※ 월성의 둘레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쓰여진 고려시대의 기준 척(尺)을 고려해보면, 월성의 둘레 1,023보는 1,902m가 됩니다(1척=31㎝, 1보=6척). 현재 월성의 바깥쪽 둘레는 2,340m, 안쪽 둘레는 1,970m 정도로 알려져 있다.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얻어 월성에 보관하다(68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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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 권2 기이 제2 만파식적 |
駕還 以其竹作笛 藏於月城天尊庫
왕이 행차에서 돌아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月城) 의 천존고(天尊庫) 에 간직하였다.
吹此笛 則兵退病愈 早雨雨晴 風定波平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는 개며, 바람이 자자지고 물결이 평온해졌다.
號萬波息笛 稱爲國寶
이를 만파식적(萬波息笛)으로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 만파식적 : 신라의 국보. 나라에 근심이 생길 때 불면 평온해진다는 전설의 대나무 피리로, 경주 월성 안의 천존고라는 창고에 보관하였다고 전한다.
경주 월성과 관련한 기록은『삼국사기』, 『삼국유사』, 『동국통감』, 『동사강목』, 『신증동국여지승람』등 다양한 문헌에서 확인된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탈해이사금 1년(57)의 기사로‘양산 아래 호공의 집을 길지라 여겨 속임수로 차지하고 이곳에 살았는데 뒤에 월성月城이 되었다.’라는 기록에서 처음 확인된다.
월성의 축조와 관련된 기사는 파사이사금 22년(101)에 ‘월성을 쌓고 왕이 거처를 성으로 옮겼다.’라는 기사를 통해 월성이 신라궁성의 역할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소지마립간 9년(487)에 월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한 후 동왕 10년(488)에 왕의 거처를 월성으로 옮기면서 신라왕궁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신라가 멸망하는 경순왕 9년(935)까지 명실상부한 신라궁성으로 자리매김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