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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야기] 이란 쉬라즈,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페르세폴리스
[여행이야기] 이란 쉬라즈,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페르세폴리스
이란 남부지방을 대표하는 대도시 쉬라즈 주변에는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페르세폴리스, 아케메네스왕조의 기틀을 다진 고레스의 묘, 페르시아 제국의 기틀을 잡은 4명의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크세르크세스 1세, 다리우스 1세, 2세의 묘가 있는 낙세로스탐과 시아파의 8대 이맘 레자(Imam Reza)의 형제인 아미르 아흐마드(Amir Ahmad)와 미르 무하마드(Mir Muhammad) 형제가 묻힌 샤에체라그 영묘,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이 만들어낸 환상적인 마술을 만날 수 있는 나즈랄 몰 모스크 등을 찾았다. [서울문화인]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설은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이 잠 못 이뤄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1928년 시인 왕평이 폐허가 된 고려의 옛 궁터 만월대를 찾았을 때 받은 쓸쓸한 감회의 가사에 개성출신 작곡가 전수린이 곡을 붙여 이애리수가 애잔하게 부른 황성옛터이다. 쉬라즈에서 1시간 남짓 달려 큰 대로를 걸어 다시 111개의 계단을 오르면 옛 제국의 영광은 비록 파괴되어 일부의 모습만이 남아 아쉬움을 자아내지만 웅장했던 그 힘은 여전히 나의 심장을 고동치게 한다. 그런 감정도 잠시 페르시아 제국의 강력했던 위엄 보다는 알렉산더 대왕의 명마 부케팔로스의 승전의 말발굽 소리가 오버랩 되어 다가온다. 페르세폴리스(Persepolis) 유적지는 현재의 수도 테헤란에서 남쪽으로 650㎞ 가량 떨어진 마르브다슈트(Marv Dasht) 평야의 쿠이라마트(Kuh-i-Rahmat, 자비의 산) 산기슭에 위치한 곳에 기원전 518년, ‘왕 중의 왕’이라는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1세(기원전 550~486년경)가 아케메네스 왕조의 수도로 세운 도시이다. 이는 기단의 남쪽 면에 새겨진 비문을 통해 그가 페르세폴리스의 창건자임을 알 수 있다. 다리우스 1세는 이 웅장한 복합 왕궁을 통치의 중심지로서만이 아니라 주로 아케메네스 왕가와 제국의 알현식과 연회를 위한 연회장, 연극 무대로 사용할 계획이었다. 다리우스 1세는 생전에 자신의 계획 일부만을 실현하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대왕(Xerxes, 기원전 486~465), 그의 손자 아르타크세르크세스(Artaxerxes, 기원전 465~424)로 이어지며 장려한 왕궁 복합 단지를 세웠다. 그러나 오늘날 볼 수 있는 페르세폴리스는 주로 크세르크세스의 작품이다. 하지만 제국의 운명은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마지막 왕 다리우스 3세(BC 336~330) 재위, 330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파괴되고 말았다. 이는 그리스의 페르시아에 대한 복수라 할 수 있다. 그리스 사람들은 기원전 6세기 중반부터 페르시아 제국의 확장으로 인해 두려워했다. 실제로 페르시아 제국의 침략으로 그리스는 고통을 받았다. 하지만 역사는 최종 승자의 기록이고 최종 승자가 된 서양에 의해 페르시아 군주는 영화 300백 처럼 이상한 형상의 모습으로 그려져 각인시켜 버렸다. 제국의 왕궁의 파괴되었지만 페르시아 제국이 얼마나 큰 힘이 있었는지는 왕궁의 부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부조에는 제국의 손 안에 있던 23개국의 사신들이 다양한 조공물을 들고 대왕을 알현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플루타르크(Plutarch)’ 기록에 따르면, 당시 알렉산더 대왕은 20,000마리의 노새와 5,000마리의 낙타에 페르세폴리스의 보물을 실어 갔다고 한다. 이를 예견이라도 한 듯 페르시아 제국의 건국자 고레스 왕(B.C. 558-529)의 묘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세폴리스를 불태우고는, 말을 타고 달려와서 고레스 왕의 궁을 불태우고 나서 내친김에 고레스의 석묘를 훼파하기 위해서 왔을 때 석묘의 글이 눈에 띄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통역관이 “나 고레스는 한 때 세계를 지배했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 땅이 다른 왕에 의해서 점령될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점령자여 그대도 언젠가는 누구에게 점령을 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 묘를 건드리지 말아 주시오”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전하자 알렉산더 대왕은 말에서 내려 자신이 입고 있던 왕복을 벗어 고레스의 묘에 덮어 주었다고 한다.(고레스 묘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그런데 의문점은 이곳은 왕궁은 산기슭을 깎아 세워졌지만 주변은 광활한 평지라는 점이다. 당시 방어적 요새로는 굉장히 불리한 조건이다. 그만큼 자신들의 힘을 믿고 방어보다는 식량 공급이 용이한 평야를 택한 것이 아닌가 싶다. 당시 권력자의 힘은 막강했지만 그 원천에는 백성의 배를 굶지 않게 하는 것이 통치자의 가장 큰 과제였을 것이다. 지금은 이란의 국교가 이슬람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이곳 곳곳에는 왕의 부조 위에는 하나의 문장이 그려져 있다. 이는 조로아스터교의 창조신 아후라 마즈다의 상징 문양이다. 조로아스터교(Zoroastrianism)는 페르시아 지역에서 발원한 이란 계통의 종교로 마즈다교(Mazdaism), 혹은 중국에서는 불을 숭상한다 해서 배화교라 불렸다. 조로아스터교는 창조신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를 중심으로 선과 악의 질서 및 세계를 구분하는 게 특징이다. 기원은 다양한 의견은 있지만 기원전 6-7세기 경 중동의 박트리아 지방에서 자라투스트라가 세운 종교이다. 이후 다리우스 1세를 통해 오늘날 이란 전역에 퍼졌으며 기원전 5세기에는 그리스 지방에까지 전해졌다. 하지만 조로아스터교는 이를 국교로 했던 사산 왕조의 멸망과 함께 그 입지는 크게 약화되었다. 현재는 이란, 인도, 중국, 쿠르디스탄을 합쳐서 약 10~30만 명 정도이며 가장 많이 분포하는 곳은 인도다. 밴드 퀸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가 인도의 조로아스터교도인 파르시 출신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일본의 미쓰비시의 이름은 조로아스터교의 신인 아후라 마즈다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고 있다. [허중학 기자]
[여행이야기] 페르시아 제국 중심 이란을 가다.
[여행이야기] 페르시아 제국 중심 이란을 가다.
[서울문화인] 이란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결코 밝은 이미지는 아니다. 중동의 이슬람 국가의 정치적 불안과 인접 국가에서 벌어지는 테러 IS와의 전쟁의 이미지로 인하여 뭉텅 거려 여행하기에는 위험할 것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또한 요즘 코로나19 감염증의 최고단계의 위험 국가로 더욱 접근이 어려워졌다. 하지만 코로나19 이전에는 이란으로의 여행은 위험하다는 것 보다는 아직은 불편이라는 말이 어쩜 더 잘 어울리는 곳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오랜 서방의 경제 제재로 인하여 서방 국가와의 단절로 여행정보를 많이 얻을 수 없다는 점이다. 물론 국내에서도 서점에서 이란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은 여전히 쉽지가 않다. 이란은 기원전 첫 제국을 건설한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페르세폴리스의 나라이자 이후, 7세기경 아라비아 반도에서 출현한 아랍 이슬람 국가의 침공을 받아 이슬람 왕조가 들어서면서 이후 이슬람 왕조가 남긴 화려하고 웅장한 유적이 곳곳에 산재하여 볼거리가 굉장히 많은 나라이다. 당시 10여일의 짧은 이란 여행이었지만 치안적인 문제는 전혀 없었다. 또한, 이곳에도 한류는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간간히 한국인이라면 우리말로 말을 걸어오는 젊은 여성들을 가끔 만날 수 있었으며, 같이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굉장히 친절한 국민들이 살아가는 나라였다는 것이다. 여행 정보가 부족한 나라이지만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이란이란 나라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이란을 포함한 중동의 국가는 모두 더운 열사의 땅이라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그렇지 않다.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거대한 사막 국가와 달리 기본적으로 사막이 아닌 고원으로 이뤄져 있다. 북쪽의 고원지대는 상당히 추워서 1년의 절반 동안 눈에 덮여 있는 곳들도 있으며, 테헤란은 해발고도가 1,400미터가 넘는 곳에 세워진 도시라서 눈이 많이 내리며, 겨울 날씨는 서울과 크게 다르지 않고 이곳도 사계절이 뚜렸하다. 또한, 서울의 북한산과 같이 테헤란 근교에는 3,800미터 고지까지 올라가서 스키를 즐길 수 있는 토찰산이 있다. 또 하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못알고 있는 상식은 이란은 아랍국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아라비아 숫자도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아랍 국가와는 선을 긋는다. 사실 이런 점이 여행자에게 불편한 점의 하나이기도 하다. 쇼핑에서 가격이 아라비아 숫자로 적혀있는 것이 아니라서 일일이 가격을 물어봐야 한다는 점이다. 그럼 이란의 민족의 어디서 온 민족일까? 이란은 중앙아시아 초원에 살던 아리아인들이다. 이들이 이란 고원에 들어온 것은 기원전 2500년쯤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1,000년 전후로는 인도 북부를 침입하여 원주민을 남쪽으로 내몰고 이들의 계급제도는 후일, 힌두교 사회질서의 근간을 이루는 카스트제도의 기원을 마련했으며, 현재 인도의 다수를 차지하는 인도이란어파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조상이 됐다. 또한,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일부는 유럽에 들어가 게르만, 슬라브, 라틴의 원조가 되었고 현재 독일인이 이 아리아인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현재 독일인이 이란을 가장 많이 찾는다고 한다. 어느 사원에서 우연히 발견한 상징 만(卍)이다. 이것은 고대 아리안 족이 행복과 번영을 상징하는 기호로 쓰였던 기호로 광신적인 사명에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나치의 상징으로 이용되었다는 것과 인도에서 출발한 불교의 상징과도 어떤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하는 조심스런 생각을 해본다. 또, 한 가지 알아야 할 점은 이란의 종교이다. 무슬림에는 두개의 계파가 있다. 무슬림인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수니파와 이를 제외한 20% 미만의 시아파다. 수니와 시아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마호메트가 죽은 후 그의 후계자에 대한 견해의 차이로 수니파는 역대 할리파(칼리파)를 계승자로 여기는 반면,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제4대 후계자)의 혈통만을 계승자로 여긴다. 수니와 시아의 또 다른 차이는 종교지도자 '이맘'에 대한 정의의 차이로 수니는 이맘이 종교적인 지위에 지나지 않으나 시아는 이맘이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지도자의 지위까지 더해졌다. 이처럼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가 수니파인데 비해 이란은 인구의 대부분은 92%는 시아파 중 열두이맘파에 속한다. 과거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미국의 지원 하에 국내 다수파인 시아파를 억압하면서 소련과 연합하여 인구 2위의 중동 대국 이란과 80년대 8년간의 전쟁을 치루기도 했었다. 이란의 음식은 기록으로 남기지 못하여 아쉬움은 있지만 식당은 물론 가정에서도 이슬람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즐겨먹는 화덕에 구운 난을 기본으로 푸석한 쌀밥에 우리네 죽 같은 스튜를 기본적으로 즐긴다고 한다. 그리고 닭, 양고기 케밥 종류의 메인 음식과 더불어 오이, 토마토, 다양한 샐러드는 기본적으로 즐길 수 있었다. 음식은 특별히 가리지 않는다면 맛있게 즐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란 여행은 터키항공의 도움으로 수도 테헤란을 비롯하여 세계 최초의 제국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페르세폴리스가 있는 쉬라즈, 이란의 첫 이슬람의 왕조였던 사파비 왕조가 세운 수도였던 이스파한의 기록이다. 쉬라즈에서는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페르세폴리스와 아케메네스왕조의 기틀을 다진 고레스의 묘, 페르시아 제국의 기틀을 잡은 4명의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크세르크세스 1세, 다리우스 1세, 2세의 묘가 있는 낙세로스탐과 시아파의 8대 이맘 레자(Imam Reza)의 형제인 아미르 아흐마드(Amir Ahmad)와 미르 무하마드(Mir Muhammad) 형제가 묻힌 샤에체라그 영묘,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이 만들어낸 환상적인 마술을 만날 수 있는 나즈랄 몰 모스크 등을 찾아 떠난다. 또한, 사파비 왕조의 5대왕 압바스 1세가 1591년에 이슬람의 지상낙원을 꿈꾸며 세운도시 이스파한에서는 이맘 광장을 주변으로 한 알리카푸(숭고한 문) 궁전, 이맘 모스크, 셰이크 로트폴라 모스크를 비롯하여 아름다운 야경으로 이스파한의 시민들로 사랑받는 400년이 넘는 시오세, 카쥬라 다리, 여러 시대에 걸쳐 증축되어 이란의 이슬람 건축 양식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저메 모스크, 이슬람 국가 이란에서 만나는 이슬람 땅에서 꽃피운 아름다운 기독교회 반크 교회, 1647년에 샤 압바스 2세(Shah Abbas II)가 자신은 물론 고관대작과 대사들의 리셉션 장소로 사용하기 위한 전용 궁전으로 체헬 소툰 궁전 등과 그리고 수도 테헤란의 박물관 기행을 떠나볼 예정이다. [허중학 기자]
코로나19로 휴관중인 미술관 이제 집에서 온라인으로 만나자.
코로나19로 휴관중인 미술관 이제 집에서 온라인으로 만나자.
[서울문화인] 코로나19 확산 예방 및 관람객 안전을 위해 현재 대부분의 국.공립박물관과 미술관, 도서관들은 휴관중이다. 하지만 휴관이 장기화 국면에 접어들자 국립중앙박물관은 박물관누리집을 통해 전시장을 관람할 수 있게 하거나 국립도서관은 온라인 열람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처럼 코로나19로 인해 전 국민의 문화예술 활동이 위축된 요즘 그나마 이런 대응은 갑작스런 휴관으로 전시를 놓쳐 볼 수 없는 사람이나 문화예술 활동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단비 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국립현대미술관의 ‘학예사 전시투어’ 영상은 집에서도 편하게 전시를 감상할 수 있는 콘텐츠로 각광받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2019년부터 유튜브를 통해 ‘학예사 전시투어’중계를 진행해왔다. 전시를 기획한 학예사가 직접 전시장을 둘러보며 작품을 실감나고 흥미롭게 설명하는 전시투어 영상은 약 30분~1시간 정도 진행된다. 영상은 국·영문 자막을 함께 제공하여 종료 전시도 언제 어디서든 편리하게 관람할 수 있다. 《광장: 미술과 사회 1900-2019》, 《덕수궁-서울 야외프로젝트: 기억된 미래》를 비롯해 총 10개 전시투어 영상을 만나볼 수 있다. 올해 개막하는 덕수궁관 전시 《미술관에 書: 한국 근현대 서예》도 전시투어를 곧 제공할 예정이며, 하반기 과천관에서 개최되는 《한국 공예 지평의 재구성 5070》전 등은 가상현실(VR) 영상으로 제작되어 선보일 예정이라 밝혔다. 학예사 전시투어 외에도 ‘10분 영상으로 만나는 소장품 강좌’, ‘한국 근·현대미술사 아카데미’와 《올해의 작가상 2019》 참여 작가 인터뷰, 2019년 개최된 ‘미술관교육 국제 심포지엄’ 중계 영상 등 다양한 주제의 교육 및 강연 영상을 유튜브 채널에서 볼 수 있다. 또한 국립현대미술관 누리집(mmca.go.kr)에서는 미술관의 주요 전시와 문화 행사 등의 정보를 정리한‘MMCA 뉴스레터’를 비롯해 미술관 연구집, 소장품 등 다양한 미술관 정보를 검색, 열람할 수 있다. 뉴스레터는 누리집에서 이메일 주소를 등록 후 이메일로도 받아볼 수 있다.(매월 1일, 15일 정기발송) 누리집 내 ‘출판’에서는 근·현대 미술, 미디어아트 및 보존과학을 주제로 한 연구집과 미술관연보 등을 내려 받을 수 있다. ‘소장품’에서는 미술관 소장품 8,477점을 검색, 열람할 수 있으며 이 중 1,182점을 고화질로 감상할 수 있다. 온라인 검색서비스 구글(Google)이 제공하는 ‘구글 아트 앤 컬처’에서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서울, 덕수궁 전시장을 스트리트뷰 영상으로 볼 수 있으며, 청주관 전시장 영상도 곧 제공될 예정이다.(artsandculture.google.com)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코로나19로 미술관 직접 방문이 어려운 상황이지만 온라인을 통해 국내 및 해외 관람객들이 집에서도 실시간으로 전시를 감상하고 미술로 감동과 위로를 줄 수 있도록 서비스를 더욱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립현대미술관 온라인 채널 - 누리집: mmca.go.kr - 유튜브: youtube.com/MMCAKorea - 네이버 TV: tv.naver.com/mmca - 인스타그램: instagram.com/mmcakorea - 페이스북: facebook.com/mmcakorea - 트위터: twitter.com/mmcakorea [허중학 기자]
[여행이야기] 신비의 도시 요르단 페트라
[여행이야기] 신비의 도시 요르단 페트라
[서울문화인] 코로나19로 많은 외부 일정이 취소 혹은 연기되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많은 시간 자가 격리의 시간을 보내고 있어 오래전 여행 사진을 보면서 희미한 기억을 되살려 여행기를 써본다. 요르단은 90%가 사막지대인 나라로 50%가 수도 암만에 모여살고 있다. 더욱이 요르단은 중동 여느 나라처럼 석유가 나지 않기 때문에 관광사업이 주요한 외화 수입원이다. 이 때문에 상당히 개방적인 나라이며, 이 중에 페트라는 황금이나 석유와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존재로 생각한다. 당시 터키에서 육로를 통해 시리아를 거쳐 암만에서 하루를 묵고 페트라가 있는 와디무사로 향했다. 당시 내가 가진 것은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부록으로 나온 지중해 동쪽의 지도 한 장이 전부였다. 페트라는 여행 중 한 장의 사진을 보고 무작정 이곳에 가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도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중간 경로인 시리아로 넘어가는 비자를 발급 받는데 조금의 어려움이 있었다. 국경검문소에서 노숙을 하면서 며칠을 기다리는 분도 있었다. 페트라는 암만에서 왕의 대로를 따라 250Km 내려가야 한다. 이 길은 알렉산더 대왕과 로마 군단이 원정을 떠났던 길이기도 하다. 25인승 정도의 승합버스로 가는 내내 풀 한포기 없는 바위 사막이 펼쳐졌다. 옆자리에 현지인 청년들이 계속해서 말을 걸어오며 와디무사에 도착하면 자신의 집에 머물라고 권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숙박업을 하던 청년이었다. 늦은 오후 와디무사라는 마을에 도착, 청년을 따라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이곳에는 숙소가 많이 있어 이곳에서 하루 밤을 보내고 새벽에 페트라를 들어가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이곳에서 약 1.5Km 내려가면 페트라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온다. 아마 새벽 6시인가? 오픈 시간에 맞춰서 도착 아마 첫 입장객이었을 것이다. 어느 정도 걷다보면 회색빛의 계곡이 나온다. 드디어 페트라 유적으로 첫 발을 내딛는 곳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협곡의 윗부분부터 회색 사암의 협곡이 붉은 색으로 변신을 시작 천천히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는 듯 협곡이 붉게 물든다. 이 광경 때문에 새벽에 이곳을 방문해야 한다. 한참을 걸어 들어가면 마치 그리스 신전을 모습을 한 알 카즈네가 협곡 틈사이로 얼굴을 내민다. 이때가 아마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 아닌가 싶다. 알 카즈네는 페트라에서 바위를 깎아 만든 건물로, 알렉산드로스의 세계와 헬레니즘 예술 전통 간의 배타적 유대를 보여준다. 알 카즈네란 이름은 2층 꼭대기에 있는 항아리 모양에서 유래되었는데 아랍어로 ‘보물창고’라는 뜻으로 이곳에 보물 있다고 여겨 이를 꺼내려고 파괴된 모습을 하고 있다. 하지만 보물은 없었다. 알 카즈네는 2층으로 이뤄졌으며, 6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다. 많은 조각들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는데 기원전후 지중해 지역에서 널리 숭배되는 이시스 여신의 부조가 새겨져 있다. 이 건물의 용도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했는데 2003년 이곳 지하에서 왕이나 귀족으로 여겨지는 50대 남성의 유골이 발견되면서 장례의식 행하였던 곳으로 판단하기도 한다. 너비 40m에 이르는 이곳은 거대한 바위를 그대로 깎아서 만든 원형경기장, 3천명은 족히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2천년이 지난 지금도 공연장으로 쓰기에 손색이 없다. 페트라를 처음 서방에 알린 사람은 스위스 탐험가 부르트하르트(1784~1817)로 1812년 시리아 여행 중 페트라에 관한 소문을 듣고 현지의 안내원을 통해 이곳에 들어왔다. 이후 1926년 첫 발굴이 시작되어 많은 것이 밝혀졌지만 아직도 대부분의 유적이 땅 속에 묻혀있다고 한다. 그 당시의 유적 80%는 모래 속에 숨겨져 있을 것이라 한다. 내가 다녀 온 이후에도 비잔틴 시대 로마의 모자이크가 발견되기도 했다. 페트라에는 8천개의 건축물과 2만 명 이상의 사람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도시는 아라비아 사막을 누비며 대상무역을 하던 유목민 나바테안들이 기원전 4세기 무렵 나바테안 인들은 이곳에 정착하며 도시를 건설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기원전후 아라비아 일대의 무역을 강력한 지배권을 행사하던 부족으로 그들은 아라비아 남부의 향료나 인도의 후추를 아라비아 북부로 운송하던 집단이었다. 특히 이곳은 이집트와 아라비아, 시리아와 페니키아 사이의 중요한 교차로에 위치하여 교역의 중심지로 나바테안 인들은 이곳을 통과하는 대상들로부터 통행세를 받았는데 그 통행세는 상품가격의 25%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사막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식수문제인데 이곳은 연 강수량이 150mm 밖에 되지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중요한 식수공급은 외부 수원에서 수로를 통해 집수지에 모여 다시 도시 곳곳으로 공급되었다. 그러나 서기 2세기 로마가 무서운 속도로 정복전쟁을 벌이면서 로마군이 이곳까지 찾아왔다. 하지만 무적의 로마군도 좁은 협곡과 험준한 산들로 정복의 애를 먹었으나 상황을 반전 시킨 것은 바로 로마군이 이 수로를 막으면서 결국 서기 106년 로마에 합병되고 만다. 이후 교역도 로마로 넘어갔으며 로마가 교역 길을 바닷길로 바꾸면서 상업도시로의 기능을 점점 상실하였다. 그러던 중, 서기 363년 치명적인 지진이 발생 도시 대부분을 파괴하고 폐허로 만들어 버렸고 사람들은 이곳을 떠나게 되었고 도시는 서서히 모래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636년에 아랍인이 다시 이 도시를 정복했지만 메카로 향하는 순례 길과는 거리가 멀었다. 또 12세기에 십자군이 이곳에 요새를 건설하여 페트라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았지만 그들은 곧 철수했고, 19세기 스위스 탐험가 부르크하르트가 이곳을 탐사했던 까지 지역 주민들의 차지가 되었다. 페트라 알데이르 수도원은 아마 페트라의 입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자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곳이 아닌가 싶다. 평지에서 바위산을 1시간 정도 올라온 듯하다. 이 건물의 원래 용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내부 벽면에 십자가가 새겨져 있어 수도원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부근은 기독교인들이 바위 굴 속에서 은둔생활을 했던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알데이르 수도원을 마지막으로 다시 하산하여 왔던 길을 서둘러 되돌아갔다. 사실 시리아에서부터 환전할 시간이 없었고 이곳에 들어오기 전 이른 시간이라서 환전을 못해서 소액이 없었으며, 가져온 물은 500mm 페트병 하나가 전부였다. 너무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 보다 당시 혼자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이곳을 가려는 계획이 없다보니 정보의 부재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늦은 오후에 페트라를 나와서는 공복의 배고픔보다 갈증으로 2리터 가량의 생수로 갈증을 해소하였다. [허중학 기자]
근대역사문화공간 3건 새롭게 문화재 등록
근대역사문화공간 3건 새롭게 문화재 등록
[서울문화인] ‘김천 나화랑 생가’를 비롯하여 ‘광주 구 무등산 관광호텔’, ‘통영 근대역사문화공간’ 등 총 3건이 문화재로 새롭게 등록되었다. 문화재청은 먼저 국가등록문화재 제775호가 된 ‘김천 나화랑 생가’는 광복 후 한국 대중음악계를 대표하는 작곡가인 나화랑(본명: 조광환)이 태어나 자란 곳으로 과거 모습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다. 또한 동시대 활동했던 음악가의 생가가 대부분 사라진 상황에서 현존하는 생가라는 점에서 음악사‧지역사 면에서 보존 가치가 있다는 점에서 지정하였다. 나화랑(1921~1983)은 ‘열아홉 순정’, ‘무너진 사랑탑’, ‘늴리리 맘보’ 등 생애 500여 편의 가요를 작곡했으며, 수많은 음반을 제작하여 한국 대중가요 보급과 발전에 공헌하였다. 국가등록문화재 제776호로 지정된 ‘광주 구 무등산 관광호텔’은 한국전쟁 이후 관광산업 육성을 위해 중앙정부에서 설악산, 서귀포, 무등산 등 국내 명승지에 건립한 관광호텔 중 유일하게 아직까지 남아있는 건축물로 관광사적 의미가 크다. 또한, 이곳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임시 피난처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지역의 근대사적 가치도 있다. 국가등록문화재 제777호로 지정된 ‘통영 근대역사문화공간(중앙동·항남동 일대/1만 4,473㎡)’은 조선 시대 성 밖 거리의 흔적들이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대한제국기부터 지속해서 조성된 매립지와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번화하였던 구시가지의 근대 도시 경관, 건축 유산이 집중적으로 보존되어 있어 큰 의미가 있다. 또한, 공간 내 개별문화재로 등록한 ‘통영 구 통영목재’, ‘통영 김상옥 생가’, 통영 중앙동 근대주택과 근대상가주택 각 2건, ‘통영 구 석정여인숙, 대흥여관’, ‘항남동 근대상가’ 등 9건은 근대도시 경관과 주거 건축사, 생활사, 산업사 등에서 가치가 높다는 점에서 지정되었다고 밝혔다. 아울러, ‘김천고등학교 본관’과 ‘김천고등학교 구 과학관’, ‘수원역 급수탑’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간행된 대표적인 불교 종합 잡지인 ‘불교’ 등 4건을 문화재로 등록 예고하였다. ‘김천고등학교 본관’은 1931년 육영사업가 최송설당(崔松雪堂, 1855〜1939년)이 민족정신 함양을 목적으로 설립한 김천 지역 대표사학의 ‘본관’ 건물로, 김천고등학교의 상징이며 한국 근대건축의 선구자인 박길룡(1898〜1943년)의 작품으로 건축사에서도 가치가 높다. ‘김천고등학교 구 과학관’건물 역시 1930년대 근대 학교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내·외부의 공간구성이 신축당시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어 보존 가치가 크다고 밝혔다. ‘수원역 급수탑’은 1930년대 국철인 광궤철도의 급수탑(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던 탑)과 사철(私鐵)인 협궤철도의 급수탑 2기가 동일한 부지 내 현존하는 희귀한 사례로, 국철과 사철의 급수탑 변화양상과 변천사를 보여주는 철도유산으로 가치가 높다. ‘불교’는 일제강점기 간행된 대표적인 불교 종합 잡지로, 1924년에 창간되어 1933년(1~108호)에 폐간되었다가 이후 속간으로 1937년부터 1944년(1~67호)까지 발행되었다. 당시 불교계 주요 인사들의 기고문을 중심으로 편집하여 일제강점기 당시 불교계 현실 인식이 담겨 있다. 특히, 1931년부터는 한용운이 편집 겸 발행을 맡아 일제의 종교 간섭을 비판하였다. 해당유물은 창간호부터 폐간호까지 전부 보존되어 있어 완결성이 있으며, 일제의 불교정책과 그에 대응하는 불교계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어 근대불교 연구를 위해서도 중요한 자료이다. 등록 예고한 4건은 30일간의 예고 기간 중 의견을 수렴,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최종 등록이 결정된다. [허중학 기자]
문화유산 ASMR로 코로나19 스트레스를 치유하자.
문화유산 ASMR로 코로나19 스트레스를 치유하자.
[서울문화인] 문화재청이 코로나19로 외부활동이 어려운 상태에서 국민의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을 주고자 문화유산을 활용한 마음 치유 콘텐츠(30분 내외)를 시리즈로 제작하여 오는 4월 말까지 매주 금요일마다 온라인(문화재청 공식 유튜브)으로 제공한다. (문화재청 공식 유튜브: http://youtube.com/chluvu) 마음 치유 콘텐츠는 그동안 문화재청과 관계 기관에서 제공해 왔던 문화유산 홍보 콘텐츠 중에서 국민에게 가장 사랑받고 있는 ‘문화유산 ASMR(에이에스엠알)'을 활용해 ‘마음 치유 문화유산 ASMR'이라는 제목으로 만든 영상들이다. 공개되는 영상들에는 명주 짜는 소리, 고택과 산사의 고즈넉한 바람 소리, 숲이나 해변의 듣기 좋은 바람 소리와 파도 소리 등이 아름다운 문화유산 영상과 함께 생생하게 담겨있다. 문화유산 마음치유 콘텐츠 총 8편 영상 공개 일정 1회 - 궁중병과 가을 상차림 (3.6./조선왕조궁중음식 국가무형문화재 제38호) 2회 - 궁중병과 겨울 상차림 (3.13./조선왕조궁중음식 국가무형문화재 제38호) 3회 - 명주짜기 (3.20./국가무형문화재 제87호) 4회 - 제주민요 (3.27./국가무형문화재 제95호) 5회 - 고택의 하루 (4.3./안동 진성이씨 온혜파 종택, 국가민속문화재 295호) 6회 - 산사 (4.10./해남 대흥사, 유네스코 세계유산) 7회 - 숲 (4.17./남양주 광릉, 사적 제197호, 유네스코 세계유산) 8회 - 몽돌해변 (4.24./완도 정도리 구계등, 명승 제3호) 문화재청은 코로나19의 확산 방지를 위해 불가피하게 국립고궁박물관 등 궁‧능 실내 관람시설은 휴관하고 있지만, 문화유산을 아끼고 사랑하는 국민을 위해 온라인을 통해서라도 문화유산을 체험할 기회를 만들고자 하는 뜻에서 이를 기획하였다고 밝혔다.. 정재숙 문화재청장은 “이번 영상콘텐츠로 코로나19 우려에 따른 외부활동 제약으로 마음의 고통을 겪고 있는 국민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밝히며 “문화재청은 이번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문화유산을 활용한 좋은 콘텐츠를 꾸준히 제작하여 국민에게 제공할 것이다”라고 했다. [허중학 기자]
한국화랑협회, 서울옥션 공동주관으로 ‘코로나19 피해돕기 온라인 자선 경매 ’연다.
한국화랑협회, 서울옥션 공동주관으로 ‘코로나19 피해돕기 온라인 자선 경매 ’연다.
[서울문화인] 미술계가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사회적 노력에 적극 동참하며, 고통받고 있는 대구 지역에 힘을 보태고자 (사)한국화랑협회와 서울옥션이 공동주관으로 ‘코로나19 피해돕기 온라인 자선경매’를 연다. 자선 경매에는 (사)한국화랑협회의 회원화랑들, 컬렉터 소장품은 물론 작가들이 직접 후원해준 작품까지 총 70여점이 선보일 예정이다. 출품된 작품은 0원부터 경매가 진행되며 최종 낙찰금은 전액 대구적십자사를 통해 대구시청으로 전달되어 코로나19 관련 피해 심각지역의 의료지원을 위한 기부금으로 사용된다. 또한 작품 낙찰 시 구매 수수료도 없다. 이번 경매에는 이강소, 최병소, 이배 등 대구 출신 작가 외 미술계 원로인 김창열 작가를 비롯해 권순철, 이왈종 작가 등도 직접 작품을 기부했다. 또한 환기미술관, 유홍준 등도 기부에 참여해 눈길을 끈다. (사)한국화랑협회 최웅철 회장은 “문화계 전체가 어려운 상황이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서로 돕고 격려하는 계기를 만들고자 했다” 고 행사 취지를 밝혔다. 온라인 경매는 오는 3월 13일(금) 오후 2시부터 서울옥션 홈페이지(www.seoulauction.com)에서 진행된다. 후원 경매 후원자 명단 및 작품 옥션 출품 순서 아트놈, 에디강, 마리킴, 하태임, 두민, 김남표, 도성욱, 김성호, 한진섭, 전병현, 유선태, 김종구, 배병우, 신학철, 이명복, 이원희, 임옥상, 이왈종, 이강소, 최병소 오수환, 박영남, 사석원, 김창열, 권순철, 박대성, 이배, 김정헌, 김건일, 정수영, 오치규, 유홍준, 웅갤러리, 동산방, 본화랑, 서울옥션, 이호재, 서울옥션 대표 이옥경, 갤러리윤, 국제갤러리, 학고재, 아트사이드 갤러리, 가나아트센터, 갤러리 미고, 갤러리 조선, 갤러리 세인, 모인화랑, 핑크갤러리&아트컨설팅, 한국화랑협회, 313 아트 프로젝트, 다도화랑, 쥴리아나 갤러리, 갤러리 반디트라소, 샘터화랑, 갤러리 포커스,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권태원, 박담회, 카페캠프통 대표이사 권예지, 조용선, 김형자, 라자, 서울옥션 블루, 윤위동, 유충목, 프린트 베이커리 [허중학 기자]
코로나 19로 휴관 중인 국립중앙박물관, 온라인 전시관 개관
코로나 19로 휴관 중인 국립중앙박물관, 온라인 전시관 개관
[서울문화인] 국립중앙박물관이 ‘코로나 19’ 위기로 인한 휴관 기간 중에도 온라인으로 박물관을 다양하게 즐길 수 있도록 누리집을 개편했다. 박물관 누리집 (http://museum.go.kr)을 접속하면 초기화면에서 바로 VR과 동영상으로 다양한 전시를 즐길 수 있다. 얼마 전 종료된 ‘가야본성 칼과 현’ 특별전을 놓쳤다면 전시실의 모습 그대로 VR로 관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주요 유물을 선택하면 간단한 설명도 볼 수 있다. 동영상으로도 다양한 전시를 볼 수 있다. 특별전시 ‘핀란드 디자인 10 000년’은 UCC로, 얼마 전 새로 단장한 세계문화관에서는 ‘이집트관’의 전시 준비과정과 전시내용을 영상에 담아 소개하고 있다. 교육프로그램도 영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박물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누구고 어떤 일을 할까 궁금하면 ‘진로탐색 박물관 전문가‘를 찾아보면 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유튜브 https://www.youtube.com/channel/UC7Pc7sflxGNdgh-ep_jlbEg) 더불어 박물관은 네이버TV와 손잡고 ‘핀란드 디자인 10 000년’, ‘세계문화관 이집트관’을 3월에 방송 할 예정이며, 전시를 준비한 학예사가 직접 전시를 소개할 예정이다. 박물관 온라인(SNS)에서는 이벤트도 진행한다. ‘따뜻한 친구, 함께하는 박물관’, ‘온라인으로 즐기는 국립중앙박물관’을 글씨로 써보자. 응모하면 무선이어폰과 박물관의 문화상품이 내손 안에 들어온다(응모 기간 2020.3.9.~18) 국립중앙박물관 내부는 휴관이지만 석조유물정원은 개방하고 있다. [허중학 기자]
영덕 양성리(洋城里)유적에서 고려의 왜구 방어용 해안 방어시설 확인
영덕 양성리(洋城里)유적에서 고려의 왜구 방어용 해안 방어시설 확인
[서울문화인] 고속국도 제65호선 포항~영덕간 건설공사(제3~5공구) 내 영덕 양성리유적에서 해안으로 침입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 시대 성곽이 확인되었다. 영덕 양성리유적은 해안으로부터 서쪽으로 1㎞가량 떨어진 낮은 야산(해발 56m)의 정상부에 자리한 곳으로 발굴조사하고 있는 재)성림문화재연구원(원장 박광열)에 따르면 야산 정상부의 약간 아래쪽 부분을 원형으로 돌아가며 땅을 굴착하고 성벽을 쌓아 올린 성곽 구조(테뫼식)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계곡을 가로막아 만든 동쪽 성벽까지 고려하면 테뫼식과 하나 또는 여러 개의 계곡을 감싸도록 성벽을 쌓은 산성의 형태의 포곡식(包谷式)이 혼합된 형태로 성곽은 둘레 약 400m, 내부 면적은 1만㎡가량으로 일반적인 성곽에 비해 규모가 작은 편이라 중요 거점을 보호하기 위해 축조된 보루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판단했다. 성벽은 흙과 돌을 섞어 쌓는 토석혼축 방식으로 만들어졌으며, 현재는 높이 2.6m, 너비 7m 정도가 남아있다. 성 안쪽에 해당하는 내벽의 경우 땅을 굴착하지 않고 자연지형에 30∼50㎝가량의 우툴두툴한 회청색 광석인 산돌과 냇가에서 다듬어진 자연돌인 냇돌을 3~5단 정도 안으로 들여쌓기하여 경사지게 조성했으며, 반면 지대가 낮은 아래쪽 외벽은 원래 지형 일부분을 수직으로 자른 후 바깥쪽으로 산돌과 냇돌을 쌓고 그 안쪽으로는 점토와 모래가 많이 섞인 사질토를 20차례 이상 엇갈리도록 수평(판축형태)으로 다져 넣어 쌓았다. 반면 지대가 낮은 아래쪽 외벽은 원래 지형 일부분을 수직으로 자른 후 바깥쪽으로 산돌과 냇돌을 쌓고 그 안쪽으로는 점토와 모래가 많이 섞인 사질토를 20차례 이상 엇갈리도록 수평(판축형태)으로 다져 넣어 쌓았다. 또한, 남쪽과 남동쪽 성벽의 외벽 바깥쪽에서는 가장자리를 따라 일정 간격(420~470㎝)으로 편평한 냇돌을 두었는데, 목책 기둥을 놓기 위한 시설로 추정했다. 이를 통해서 볼 때 양성리 성곽은 성벽 외벽에 보조적 방어 시설인 목책(木柵, 말뚝을 울처럼 두른 형태)을 두른 형태로 축조되었던 것으로 내다봤다. 다만 목책 관련 시설 주변으로 불에 그슬린 흔적 등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목책은 화재로 소실된 것으로 판단하였다. 성곽 내부에서는 건물지(창고‧망루시설) 12기, 배수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해안이 조망되는 성곽의 정상부에는 사각의 망루 시설을 만들었고, 그 동쪽으로 온돌을 갖춘 건물지 4동을 조성하였다. 이와 함께 남쪽 성벽 내벽을 따라 사각형의 건물지 7기를 일렬로 배치하였는데, 이 중 일부는 화재로 소실된 후 건물을 다시 조성하여 사용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한편 4호 건물지 내부에서는 디딜방아 시설과 함께 다량의 탄화미가 확인되고 있어 곡식 창고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양성리유적 성곽에 대해서 과거 문헌 기록들에서 언급된 것은 확인하지 못하였지만 다만, <고려사>(高麗史)에 ‘왜구가 강릉부(江陵府) 및 영덕현(盈德縣)․덕원현(德原縣)을 노략질하였다.(세가 권43 1372년 6월6일), 왜구가 송생(松生)․울진(蔚珍)․삼척(三陟)․평해(平海)․영해(寧海)․영덕(盈德) 등지를 침략하고, 삼척현을 불살랐다.(권134 열전 권제47 1381년 3월)’라는 기록을 볼 때, 양성리 일원 주변 역시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양성리유적에서 확인된 성곽은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하여 해안가 조망이 유리한 곳에 축조한 당시의 해안 방어시설이었을 것으로 판단할 근거로 봤다. 이번에 발굴된 양성리유적 성곽은 동해안 지역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고려 시대 토석혼축 목책성곽이라는 점과 더불어 성곽 내 건물의 배치, 성벽 축조기법과 구조의 특이함은 그 당시 성곽축조 방법과 구조 변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평가했다. 더불어 발굴현장은 코로나 19(COVID-19) 진행 추이를 검토하여 추후 일반인에게 공개할 예정이라 밝혔다. [허중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