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1,188건 ]
올해 문화재청 중점업무, 무엇이 달라지나?
올해 문화재청 중점업무, 무엇이 달라지나?
[서울문화인] 문화재청은 지난 60여 년간 유지되어온 문화재 보호 체계 변화의 필요성과 함께 문화유산을 일상적인 여가공간으로 누리고자 하는 국민의 목소리가 높아짐에 따라 지난 11일 ‘국민과 함께 누리는 문화유산’을 만들어 가기 위한 방침을 선정, 이를 바탕으로 “문화재청 2020년도 주요업무 추진계획”을 4대 전략 목표와 15개 과제를 발표했다. 먼저 4대 전략 목표로는 ▲관리의 사각지대에 있던 비지정문화재까지 보호할 수 있도록 역사문화자원 전수조사를 실시하는 등 문화유산 관리체계를 조정(문화유산 미래역량 강화), ▲국내 세계유산을 거점으로 내외국인의 관광을 확대하는 문화유산 방문캠페인 같은 지역문화유산을 활용한 프로그램 육성과 디지털 콘텐츠 개발, 무장애공간 확충 등을 통한 문화유산 향유 기회를 넓힘(포용하고 함께하는 문화유산 향유), ▲전통소재(안료ㆍ아교) 국산화와 무형문화재 전승지원금 확대, 첨단기술을 활용한 안전 관리, 한국전쟁과 4.19 관련 문화재의 복원ㆍ정비를 통해 굳건한 문화유산 보전ㆍ전승환경 구축에도 노력(문화유산 보전전승), ▲궁궐과 조선왕릉을 국제적인 명품 브랜드로 만들고, 세계유산 등재 확대 등을 통해 우리 문화유산의 세계적 입지도 구축(세계 속에 당당한 우리 문화유산)과 함께 이에 대한 15개 과제를 밝혔다. 문화유산 미래역량 강화 문화유산 관리체계 혁신, 일상생활 속 불편 완화, 문화재 산업 육성을 통한 일자리 창출 등 문화유산 분야의 미래역량을 강화을 위해 훼손‧멸실 우려가 있는 역사문화자원(비지정문화재)을 올해부터 5년간 전수 조사해 포괄적 문화재 보호체계의 기초를 마련하고, 근현대문화유산‧자연유산 수중문화재‧비지정문화재의 관리체계를 법제화해 기존 관리의 사각지대를 줄여나간다. 생활밀착형 문화재정보 제공 서비스를 확대하기 위해 문화재구역 위치범위 정보 등 문화재공간정보 원본자료 15만 건을 전면 개방되며, 문화재 관련 콘텐츠를 활용한 마을기업(주민관광해설, 전통기술, 전통식품 등)의 창업지원 유형을 개발하고, 문화재 돌봄 인력과 안전경비원 및 궁능 일자리 확대(1,945명→1,988명), 무형문화재 이수자 대상 전수교육관 문화예술교육사 신규 배치(70명), 문화유산 활용사업 확산을 통해 안정적이고 지속 가능한 문화재형 일자리 창출에도 힘쓴다. 포용하고 함께하는 문화유산 향유 지역문화유산 관광자원 육성지원, 문화유산 교육, 문화유산 디지털콘텐츠 구현, 배려계층 대상 문화유산 향유 기반을 조성을 위해 지역문화유산 육성을 위해 고택종갓집 활용 프로그램을 신설하고, 문화재 야행, 생생문화재 사업 등 지역별로 특색 있는 기존의 문화재 활용프로그램을 확대하고 지역문화재 활용사업에 필요한 전문인력 양성도 강화(120명→180명, 현장중심 맞춤형 교육)한다. 또한 내용과 표현이 어렵다는 지적에 따라 지난해부터 시작한 문화재안내판 개선사업을 올해도 이어나간다. 문화유산을 쉽게 이해하고, 흥미를 높일 수 있는 문화재 가상체험(수원 화성 축조과정 등) 콘텐츠와 유무형유산 통합콘텐츠 등을 개발보급하고, ’22년까지 한양도성을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여 가상공간에 복원된다. 인천공항 제1터미널 입국장에 공항 이용객들이 즐길 수 있는 전통문화 미디어를 설치하고, 국립무형유산원에도 무형유산 뉴콘텐츠체험관을 개관한다. 또한, 문화유산 관람시설에 휠체어 경사로 등 무장애공간 설치를 확대하고, 수화 공연해설 등 문화유산 무장애 공연관람 지원 서비스도 확대(국립무형유산원‧국립고궁박물관)된다. 굳건한 문화유산 보전전승 문화재 안전관리, 온전한 문화유산 보수복원, 문화재 수리 품질 향상, 무형문화재 전승기반 구축 등을 통해 굳건한 문화유산 보전전승 환경을 구축을 위해서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한 전기화재 예방 ICT(정보통신기술) 시스템을 처음으로 고택 등 문화재 소유자관리자가 상주하고 있는 문화재(50건)에 우선 설치하고, 침입상황에 따라 지능적으로 대응하는 침입감시 시스템 개발 등 새로운 기술을 문화재 안전관리에 도입 추진한다. 한국전쟁 관련 기록물 등 200여건이 목록화 된다. 참전용사 유물 등 10여건 문화재를 등록지정하고, 한국전쟁 중 많은 신병을 배출하여 서울 재탈환 등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던 제주 구 육군 제1훈련소 등을 보수·정비하여 국민들에게 개방된다. 광화문 월대와 임청각 등 일제강점기에 변형 훼손된 문화재를 지속 복원정비하고, 시대별문화권별 조사연구와 정비활용할 수 있도록 법적근거를 마련된다. 또한, 주민주도형 마을해설사 양성 등을 통해 고도(古都)보존지역 주민들에게 새로운 형태의 지원사업을 발굴지원하고, 가야문화권의 중요유적 발굴사업과 가야고분군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며, 운현궁 아재당 복원한다. 조선옛길(10로), 김중업건축박물관(구 유유산업 시설물) 등 근현대 산업시설(8건), 훈맹정음(점자로 된 훈민정음, 1926년 제생원 맹아부 교사 창안) 등 다양한 중요문화유산 자원은 문화재로 지정등록을 추진한다. 무형문화재 전승지원금의 지원을 확대하고, 고령의 전수교육조교를 대상으로 신청을 통해 명예보유자 인정하여 전승활동에 평생을 헌신한 전수교육조교에 대한 예우를 강화해 나가며, 무형문화재 보유자와 보유단체만 가지고 있는 전수교육 권한을 전수교육조교로까지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되며, 지역전수교육관을 확충된다. 세계 속에 당당한 우리 문화유산 궁궐왕릉 세계적 명품 브랜드화, 세계유산 등재 확대, 국외문화재 전략적 환수활용, 문화재 국제교류 및 협력을 지속 확대를 위한 방안으로는 궁중문화축전의 확대(연 1회→ 2회) 개최와 조선왕릉문화제를 왕릉별 차별화된 궁능 명품 활용 프로그램으로 육성지원하고, 조선왕릉 18개소를 연결하는 순례길로 조성하는 방안을 마련한다. 또한 궁궐 전각을 추가 개방(경복궁 흥복전, 창덕궁 궐내각사, 덕수궁 덕흥전)하고, 경복궁 야간관람 가능일수를 확대(71일→91일)하는 한편, 교통카드를 이용한 현장 무인입장시스템 사용가능 궁능을 확대(창경궁덕수궁 → 경복궁창덕궁선릉서오릉융릉 등 5개소 추가)하고, 궁중문화축전 프로그램 중 시민참여 프로그램도 확대(창덕궁, 시간여행 그날) 한다. 아울러, 궁궐을 한류 콘텐츠 제작장소로 활용하고, 무형문화재 보유자이수자에게 공연‧공예작품 전시 장소로 제공할 방침이다. 또한, 세계유산 등재 확대을 위해 올해 안으로 ‘한국의 갯벌’과 ‘연등회’가 유네스코 유산으로 등재(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12월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 되도록 노력하고, ‘한국의 탈춤’에 대해서도 인류무형유산 등재신청서를 이달에 제출할 것이라 밝혔다. 이 외에도 국외문화재 환수방식을 다각화하고, 중장기 환수전략을 마련한다. 국외소재 우리 외교공관 등 국외부동산 문화재 현황을 파악하고, 중점활용 대상을 선정하는 한편, 남북교류 협력 확대하여 비무장지대(DMZ)의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DMZ 남측지역 실태조사와 잠정목록 등재를 추진한다고 밝혔다. [허중학 기자]
[여행이야기] 이란-쉬라즈, 시아파 8대 이맘의 샤에체라그 형제의 영묘
[여행이야기] 이란-쉬라즈, 시아파 8대 이맘의 샤에체라그 형제의 영묘
쉬라즈는 해발 1,486m높이에 세워진 도시로 1750-1781년까지 잔드왕조(Zand Dynasty)의 수도이자 수천 년 동안 지방무역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현 이란의 수도인 테헤란에서는 남서쪽으로 약 900Km떨어져있다. 이곳 샤에체라그 영묘는 시아파(Shi'ite)의 중요한 성지 순례지이다. 타일장식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나시르알몰크사원(Nasir-al-Mulk Mosque)과 19세기 콰자르왕조의 왕궁인 과자르왕궁(Ghajar Palace)이 있다. 쉬라즈는 BC2000년경에 세워졌다. 쉬라즈라는 이름은 서기 2세기경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서울문화인] 835년에 세워진 샤에체라그 영묘(Shah-e-Cheragh)는 이란 파르스주(州) 쉬라즈에 있는 이슬람 시아파의 중요한 성지순례지로 8대 이맘 레자(Imam Reza)의 형제인 아미르 아흐마드(Amir Ahmad)와 미르 무하마드(Mir Muhammad) 형제가 묻혀있는 곳으로 매년 이곳에는 수천 명의 순례자들이 다녀가는 곳이라 한다. 쉬라즈는 샤에체라그로 불리는 형제는 시아파 분파의 종교박해로 인해 이곳에 피난 왔다가 죽음을 맞이한 곳이다. 이곳을 방문했던 12월, 운이 좋게도 이들의 순교일로 도시가 국경일로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그들이 박해로 순교한 것을 기리고 있었다. 특히 두 형제의 박해의 고통을 함께 하고자 철사슬로 만든 채찍으로 자신의 등을 치면서 광장을 돌고 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샤에체라그 영묘는 14세기에 타쉬카툰 여왕(Queen Tashi Khatun)이 인근에 신학교와 모스크를 건설하면서 이 무덤을 성스러운 곳으로 지정하였고, 수세기에 걸쳐 보수와 증축이 이루어졌다. 묘지는 둥근 돔으로 되어 있으며 타일로 마감을 하였다. 그리고 아름다운 은으로 된 문과 정교한 거울 장식들은 그 당시 쉬라즈에서 최고가는 장인들의 걸작품으로 매우 섬세하며 완성도가 높다. 영묘 안에는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희귀한 코란, 서적, 주화, 섬유, 철 제품, 도자기류 범랑, 공예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내부는 유리타일로 꾸며졌다. 아쉽게도 내부는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촬영을 할 수 없다. 사전에 이런 사실을 모르고 사진을 찍는데 관리인이 다가와서 이곳은 사진을 찍을 수 없다며 알려주었다. 다행히 몇 장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낯선 동양인의 한 무리가 이곳을 찾은 것이 새로운지 우리 일행을 사무실로 초대하여 차를 대접해 주었다. 저녁에 다시 이곳을 찾았다. 원래 야간에도 개방을 하는지 아니면 이날이 순교일이여서 개방을 하는지는 사실 정보를 얻지 못했다. 아직도 제대로 된 정보를 확인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한국에서 이란은 여전히 먼 나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허중학 기자]
[여행이야기] 이란-바위를 깎아 만든 제국 왕들의 무덤, 낙쉐 로스탐
[여행이야기] 이란-바위를 깎아 만든 제국 왕들의 무덤, 낙쉐 로스탐
[서울문화인] 낙쉐 로스탐(Naqsh-e Rostam)은 페르세폴리스 북동쪽 약 5, 6km 지점, 고레스 대왕의 묘에서 그리 멀지 않은 파르스, 그곳 큰 바위에 돋을새김을 한 무덤 군을 일컷는 곳이다. 이곳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다리우스 1세를 비롯하여 그 후계 군주 크세르크세스 1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다리우스 2세의 왕묘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조로아스터교 신전이라는 설도 있다고 한다. 수수께끼 같은 무덤들과 바위에 새긴 부조들이 있는 이곳의 명칭, 낙쉐 로스탐은 페르시아의 영웅 로스탐에 얽힌 중세의 전설에서 얻었다고 한다. 7세기에 아랍 군대가 페르시아에 이슬람교를 들여왔을 때 많은 이교(異敎) 기념물들이 파괴되었다. 하지만 페르시아 학자들은 이 부조들이 이슬람의 영웅 로스탐을 나타낸 것이라 추측하여 보존해 두었다고 한다. 여하튼 다양한 설이 있지만 먼저 직사각형 내 위쪽에는 페르세폴리스에서 많이 본 제국의 대왕이 서서 조로아스터교의 최고신인 아후라마즈다에게 예배하고 있는 모습이 부조되어 있다. 그리고 왕묘 아래쪽에는 사산 왕조 군주들의 영웅적인 정복 행위를 알리는 설명문을 비롯하여 7개의 부조들이 새겨져 있다. 그것들은 사산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아르다시르 1세의 서임식(敍任式), 샤푸르 1세의 전승도(戰勝圖), 바흐람 2세의 입상과 기마전투도, 나르사프의 서임식 등이다. 그 중에서도 샤푸르 1세(Shapur Ⅰ, 재위 AD 241~AD 272)가 로마 황제를 포로로 한 전승도는 대표적인 명작으로 알려져 있다. 샤푸르 1세는 260년 에데사 부근의 전투에서 로마의 황제 발레리아누스를 사로잡고 이 승리를 이곳에 새겨놓았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글을 기록해 두었다. "발레리아누스는 29개의 유럽의 부족(비문에는 29개의 부족의 이름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으로 구성된 군대와 함께 전투에 임했다. 알레하(Alreha)와 에뎃사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다. 우리는 완벽한 승리를 거두고 발레리아누스을 포로로 잡았다. 우리는 그의 수많은 장군들, 원로원 의원들, 고위 장교들을 전쟁포로로 잡아서 페르시아 영토 각지로 유배를 보냈다." 포로가 된 발레리아누스는 샤푸르 1세가 말에 오를 때 발레리안을 디딤돌로 사용한다는 소문과 함께 죽을 때까지 노예 취급을 받으며 사후에도 박제가 되어 신전에 전시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이 전쟁의 패배는 로마 군인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치욕거리가 되었다. 또한, 아르다시르 1세의 서임식 장면에는 '이란'이라는 이름의 사용이 처음으로 기록되어 있는 비문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 낙쉐 로스탐은 거대한 부조물에 압도됨 보다는 역사의 한 페이지에 들어와 있다는 느낌이 더 들었다. [허중학 기자]
[여행이야기] 이란-종교를 넘어 순례지가 된, 고레스 대왕의 묘
[여행이야기] 이란-종교를 넘어 순례지가 된, 고레스 대왕의 묘
[서울문화인] 페르세폴리스 북동쪽 6㎞ 가량 되는 지점 파사르가드(Pasargad)의 황량한 사막지대에 파괴된 왕궁 터 인근에 유독 온전한 채 남아있는 커다란 석조물이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이 석조물은 지금 터키 지역의 리디아 오아국부터 이라크 지역인 바빌로니아까지 점령하고 오리엔트를 지배하에 두며 페르시아 제국의 기틀을 마련한 ‘왕 중의 왕’이라 칭송받는 페르시아제국의 건설자, 키루스 대왕(키루스 2세, 고레스 대왕, BC 585? ~ BC 529)의 묘이다. 그는 전쟁을 위해 해외 원정 중 그 위대한 생애를 마치게 되었는데 그가 세운 왕궁 터 인근에 커다란 석묘를 만들어 안치되었다. 이 무덤에 사용되어진 돌들은 70km떨어진 곳에서 운반되었다고 한다. 그는 석묘가 지금까지 온전히 남아있는 것은 석묘의 견고함이 아니다. 그는 주변국을 정복했지만 그 지방의 신(神)을 인정하고, 풍습을 존중하며, 자치를 허용하는 등 유화정책 때문일 것이다. 또한, 키루스 2세(고레스 대왕)는 인간의 기본권에 대해서도 최초의 선언을 하였으며 이것들을 그릇과 석비에 새겨 남겼다. 그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였고, 자신의 군인들에게 점령지 주민들을 약탈하거나 위협하는 행동을 금지시켰다. 또한 자신의 개혁정신을 전하고 점령지를 개발하려는 공공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이러한 기록들은 현재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복사본은 뉴욕의 유엔본부에도 전시되어 있다. 특히 바빌로니아를 점령한 후에 칙령을 내려 바빌로니아에 의해 끌려온 유대인들을 풀어줘(구약성경 에스라서 제1장), 이들이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가를 해준 것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이 재건될 수 있도록 재정적 지원도 아끼지 않는다. 성경에도 이 일이 기록되어 있으며 페르시아 왕인 키루스 2세를 칭송하는 많은 구절을 볼 수 있다(구약성경 이사야서 제45장). 이에 유대인들은 그를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 그리고 '하나님의 목자' 등으로 칭송하였다고 한다. 그런 이유일까.. 고레스 대왕의 묘에는 종교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의 성지가 되어 순례객이 찾아온다고 한다. "페르시아인들이 말하기를 다리우스는 상인이고 캄비세스는 장인인 반면 키루스는 아버지라고 한다. 왜냐하면 다리우스는 늘 어떤 결과나 이익을 중시 여겼고 캄비세스는 거칠고 가혹했지만 키루스는 자상하게 배려해 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적국이었던 그리스에서도 오랫동안 위대한 군주로 칭송받았다. 그리스의 역사가 크세노폰(Xenophon)은 자신의 책에서 키루스 2세를 가장 이상적인 지도자로 묘사하며 '비길 자가 없는 가장 위대한 세계 정복자'로 표현했다. 헤로도토스도 키루스 2세를 그의 후계자들과 비교하여 그의 뛰어남을 증명하였다. 메데인들은 키루스를 정복자로 생각하지 않았고 자신들과 같은 혈통의 왕으로 여겼다. 알렉산더 대왕의 일화에서도 그가 페르세폴리스를 불태우고는, 말을 타고 달려와서 고레스 왕의 궁을 불태우고 나서 내친김에 고레스의 석묘를 훼파하기 위해서 왔을 때 석묘의 글이 눈에 띄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통역관이 “나 고레스는 한 때 세계를 지배했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 땅이 다른 왕에 의해서 점령될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점령자여 그대도 언젠가는 누구에게 점령을 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 묘를 건드리지 말아 주시오”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전하자 알렉산더 대왕은 말에서 내려 자신이 입고 있던 왕복을 벗어 고레스의 묘에 덮어 주었다고 한다. 역사상 키루스 2세처럼 여러 민족으로부터 칭송을 받는 왕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허중학 기자]
대구미술관, 대구 미술인 지원 프로그램 ‘나의 예술세계’공모
대구미술관, 대구 미술인 지원 프로그램 ‘나의 예술세계’공모
[서울문화인] 대구미술관은 코로나19 사태로 어려움을 겪는 지역 미술인을 위해 온라인 홍보영상 제작지원 프로그램인 ‘나의 예술세계’를 실시하고 이달 16일부터 20일까지 참가 신청을 받는다. 대구미술관(관장 최은주) 주최, 대구미술협회(회장 이점찬)가 후원하는 ‘나의 예술세계’는 대구작가와 미술관련 종사자를 대상으로 작가 30명, 제작진행자 15명을 선정하여 온라인으로 홍보하는 프로그램이다. 대구미술관은 프로젝트에 선정된 작가에게는 영상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작품세계와 예술철학을 소개할 기회를 제공하고(인터뷰, 관련 자료 협조), 제작진행자에게는 선정 작가의 철학과 예술 특징을 담은 영상 콘텐츠를 기획(작가연구 및 인터뷰, 원고제작 및 편집)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신청서 접수기간은 3월 16일부터 20일까지며 대구미술관 홈페이지 공지사항에서 신청서를 내려 받아 온라인 접수(mypark3@korea.kr)하면 된다. 심사 결과는 3월 말 예정이며,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 대구미술관 공식 채널을 통한 ‘나의 예술세계’ 영상 업로드는 4월 중순 순차적으로 실시한다. 이 외에도 대구미술관은 전시 소개, 참여 작가 인터뷰 영상을 유튜브 및 온라인 채널에 제공하여 코로나19로 미처 관람하지 못했던 대구미술관 전시를 집에서도 감상할 수 있도록 온라인 전시 서비스를 강화하고 있다. 대구미술관 최은주 관장은 “이번 프로젝트가 대구 미술인을 위한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지역 미술인들의 예술성과 다양성을 재발견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허중학 기자]
[여행스케치]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페르세폴리스  ③
[여행스케치]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페르세폴리스 ③
[서울문화인] 페르세폴리스(Persepolis) 유적지는 현재의 수도 테헤란에서 남쪽으로 650㎞ 가량 떨어진 마르브다슈트(Marv Dasht) 평야의 쿠이라마트(Kuh-i-Rahmat, 자비의 산) 산기슭에 위치한 곳에 기원전 518년, ‘왕 중의 왕’이라는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1세(기원전 550~486년경)가 아케메네스 왕조의 수도로 세운 도시이다. 이는 기단의 남쪽 면에 새겨진 비문을 통해 그가 페르세폴리스의 창건자임을 알 수 있다. 다리우스 1세는 이 웅장한 복합 왕궁을 통치의 중심지로서만이 아니라 주로 아케메네스 왕가와 제국의 알현식과 연회를 위한 연회장, 연극 무대로 사용할 계획이었다. 다리우스 1세는 생전에 자신의 계획 일부만을 실현하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대왕(Xerxes, 기원전 486~465), 그의 손자 아르타크세르크세스(Artaxerxes, 기원전 465~424)로 이어지며 장려한 왕궁 복합 단지를 세웠다. 그러나 오늘날 볼 수 있는 페르세폴리스는 주로 크세르크세스의 작품이다. 하지만 제국의 운명은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마지막 왕 다리우스 3세(BC 336~330) 재위, 330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파괴되면서 제국의 운명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허중학 기자]
[여행스케치]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페르세폴리스 ①
[여행스케치]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 페르세폴리스 ①
[서울문화인] 페르세폴리스(Persepolis) 유적지는 현재의 수도 테헤란에서 남쪽으로 650㎞ 가량 떨어진 마르브다슈트(Marv Dasht) 평야의 쿠이라마트(Kuh-i-Rahmat, 자비의 산) 산기슭에 위치한 곳에 기원전 518년, ‘왕 중의 왕’이라는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1세(기원전 550~486년경)가 아케메네스 왕조의 수도로 세운 도시이다. 이는 기단의 남쪽 면에 새겨진 비문을 통해 그가 페르세폴리스의 창건자임을 알 수 있다. 다리우스 1세는 이 웅장한 복합 왕궁을 통치의 중심지로서만이 아니라 주로 아케메네스 왕가와 제국의 알현식과 연회를 위한 연회장, 연극 무대로 사용할 계획이었다. 다리우스 1세는 생전에 자신의 계획 일부만을 실현하였다. 그리고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대왕(Xerxes, 기원전 486~465), 그의 손자 아르타크세르크세스(Artaxerxes, 기원전 465~424)로 이어지며 장려한 왕궁 복합 단지를 세웠다. 그러나 오늘날 볼 수 있는 페르세폴리스는 주로 크세르크세스의 작품이다. 하지만 제국의 운명은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마지막 왕 다리우스 3세(BC 336~330) 재위, 330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파괴되면서 제국의 운명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허중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