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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어린이들의 ‘친구’이자 ‘자신’인 인형으로 꾸며진 국립민속박물관 새 전시
[박물관] 어린이들의 ‘친구’이자 ‘자신’인 인형으로 꾸며진 국립민속박물관 새 전시
[서울문화인] 어린이에게 인형은 예나 지금이나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나의 말을 들어주고 위로해주는 내 친구’이자 나의 또 다른 자아가 주입된 자신이기도 하다. 특히 코로나19로 친구들을 만나기 어려웠던 최근에는 그 어느 때보다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때마침 국립민속박물관 어린이박물관에서 새롭게 진행되는 ‘골골이와 인형친구들’은 최근의 상황과 너무나 잘 맞는 전시가 아닌가 싶다. 코로나19로 임시 휴관하였던 국립민속박물관의 재개관과 함께 선보이고 있는 ‘골골이와 인형친구들’은 국립민속박물관의 세계인형조사(2018 ‘삶의 또 다른 모습, 인형’)로 수집된 인형을 바탕으로 기획한 전시로 봉제인형부터 로봇까지 총 241점의 세계 여러 나라 인형이 전해주는 의미를 통해서 흥미와 즐거움은 물론 나와 친근한 인형들이 고민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인형과 내가 일체가 되어 몰입과 공감을 할 수 있도록 체험형 전시로 꾸며졌다. 전시장은 어린이들은 6개의 주제 공간(‘나는 왜 이럴까?’ ‘나도 할 수 있어’ ‘내 이야기를 들어봐’ ‘너도 그래? 나도 그래’, ‘내가 도와줄게’ ‘빛나는 나 소중한 나’)에서 다양한 체험 활동 위주로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보고 느끼고 공감할 수 있게 꾸며졌다. 나도 할 수 있어! 이공간은 어린이들이 자기의 고민과 같은 고민을 가진 다양한 모습의 인형을 만나고 체험활동을 하면서 ‘나도 할 수 있어’라는 자신감과 씩씩한 마음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왜소하고 미완성인 자기의 모습 때문에 친구도 없이 늘 다락방 구석에서 외롭게 지내는 주인공 ‘골골이’는 언제나 ‘나는 왜 이럴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친구들이 못 생겼다고 놀리면 어떡하지?’ 등 고민이 많지만 바깥세상이 궁금하다. 전시장에 온 어린이들에게 도움을 청한 골골이는 친구들을 만나러 길을 나선다. 인형마을에서 여러 친구들을 만나면서 자기만 고민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용기를 내어 말해보고 다른 친구들을 도와주면서 점점 얼굴에 따뜻한 미소가 번지고 마음은 색색의 하트로 반짝이게 된다. 이제 골골이는 할 수 있는 자신감을 가지며 누구와 비교하지 않고 나를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용기임을 알게 된다. 너도 한번 해 봐~ 이름은 호두까기지만 호두를 까지 못해 고민인 호두까기 인형을 만나는 인형가게에서 호두까기 인형 도와주기, 인형 만들기 등 다양한 체험 활동을, 인형극장에서는 줄인형 체험, 나도 극작가 체험 활동을 통해 자기의 이야기를 만들어 볼 수 있다. 또한, 다리 다친 루시와 걱정인형이 있는 ‘고민자판기’에서는 관람자가 자기 고민거리의 해결방법을 영수증으로 받아볼 수 있다. 신나게 즐기는 영상 체험 재미있는 이야기를 잘하는 기뇰 인형이 있는 인형극장 무대 위에서 청운초등학교 4학년 네 명의 어린이들이 부른 노래에 맞춰 율동을 따라하면 어느새 내가 기뇰이 되어 춤을 추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내가 도와줄게’ 공간에서 물에 젖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고민하는 루피타 인형을 위해 관람자가 빨리 통나무 다리를 놓아주면 루피타와 지금까지 만났던 인형친구들이 다 같이 물을 건너 놀이공원으로 갈 수 있다. 마지막 ‘빛나는 나 소중한 나’ 공간은 모든 친구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친구가 되고 친구들과의 소중한 만남이 있는 곳이다. 놀이공원으로 구현한 공간에서 어린이들은 골골이 찾기 등 다섯 개의 게임을 즐길 수 있다. 이번 전시를 위해 어린이박물관은 2019년 11월부터 4개월간 초등 1학년에서 4학년까지 약 100명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고민 설문조사’와 ‘추억의 자료 수집’을 하였다. 설문조사를 통해 어린이 각자의 고민과 듣고 싶은 말에 대해서 진솔한 대답을 전시 기획 때 제일 중요한 요소로 주제별 부분마다 삽입되었다. 또한, ‘추억의 자료 수집’에서는 애착 인형 78점, 인형과 함께한 사진 120장을 대여 또는 기증을 받아 전시에 활용되었다. 더불어 전시기간 동안 박물관 인스타그램(@tnfmk#골골이와인형친구들#국립민속박물관)에 ‘인형과 함께한 사진’ 올리기 등 다양한 전시 연계 행사를 지속적으로 진행된다. 이번 전시와 더불어 박물관의 찾아가는 버스가 ‘골골이와 인형친구들’로 새롭게 단장되었다. 새롭게 꾸며진 버스는 지역 박물관을 방문하여 그곳 어린이들도 직접 참여하여 즐길 수 있게 꾸며졌다. 한편, 현재 국립민속박물관의 어린이박물관은 1, 2층 2개 전시장을 통해 각 2년 주기로 새로운 전시를 진행하고 있다. 이번 2층 ‘골골이와 인형친구들’ 전에 앞서 1층에서는 우리 옛이야기 ‘개와 고양이와 구슬’을 주제로 2018년 11월부터 선보이고 있다. ‘개와 고양이와 구슬’은 1964년부터 1981년까지 초등학교 <국어> 1학년 2학기 교과서에 ‘개와 고양이’라는 제목으로 실려서 기성세대에게는 낯익은 이야기이다. ‘견묘쟁주설화(犬猫爭珠說話)’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내용의 이야기들이 전승되고 있는데, 전시는 어린이 운동의 선구자인 소파 방정환 선생이 1922년 구술하고 민속학자인 손진태 선생이 채록한 ‘개와 고양이와 구슬’ 이야기를 바탕으로 마음씨 착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위해 개와 고양이가 구슬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를 어린이 눈높이의 체험 전시로 진행되고 있다. [허중학 기자]
국립민속박물관, 기산을 통해 100년 전 조선의 일상과 마주하다.
국립민속박물관, 기산을 통해 100년 전 조선의 일상과 마주하다.
[서울문화인]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그려낸 그림을 일반적으로 풍속화라 일컫는다. 조선시대에는 다른 어느 때 보다 풍속화가 다양하게 발달하였다. 특히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풍속화가 가장 융성하게 발달하였다. 풍속화는 기준을 좁은 의미로는 궁궐이 아닌 민간의 생활상을 다룬 그림으로 한정하여 사인 풍속도(士人風俗圖)와 서민 풍속도(庶民風俗圖)로 나눌 수 있다. 사인 풍속도는 사대부의 생활상을 그린 것으로 수렵도, 계회도, 시회도, 평생도 등의 주제로 유행하였다면 서민 풍속도는 일반 백성들의 다양한 생활상을 다룬 것으로, 풍속화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궁중에서도 임금이 정치의 참고 자료로 삼기 위하여 서민 풍속화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참고로 여인들의 생활이나 자태를 그린 미인도(美人圖)도 서민 풍속도에 속한다. 미인도는 원래 궁중 여인들을 그린 사녀도(仕女圖)에서 연원한 것으로 조선 후기에는 기생을 비롯한 신분이 낮은 여인들을 화폭에 담았다. 그리고 우리가 풍속화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나 혜원 신윤복(申潤福, 1758〜?)을 떠올린다. 또한 이 두 화가는 조선시대 그 어느 화가보다 국민적 사랑을 받고 있는 화가이기도 하다. 그럼 두 화가가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그들이 그려낸 풍속화는 산수화처럼 그림을 보는 깊이가 없더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조선의 산수화는 대개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현재의 모습과는 괴리감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려낸 풍속화는 다른 화가들의 풍속화에서는 느낄 수 없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도 밀접한 연관성이 있는 서민들의 모습을 간결하면서도 해학적으로 담아내었다는 점에서 더 편하게 다가오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그럼 단원이나 혜원만이 풍속화를 그려왔을까. 그렇다면 국립민속박물관으로 달려가 보자. 오래전부터 국립민속박물관 상설전시실 한켠에 단원의 그림과 유사한 조선시대 서민들의 모습을 그린 풍속화 몇 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비록 단원의 솜씨에는 크게 미치지는 못하지만 주변의 풍경은 생략한 채 오로지 당시 생활상을 표현한 그 그림의 작가는 바로 기산 김준근의 풍속화였다. 그러나 그 몇 작품으로 그를 판단했던 것은 나의 무지였다고 밝히고 싶다. 국립민속박물관, 기산을 통해 100년 전 조선의 일상과 마주하다. 20일(수)부터 국립민속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그 기산의 작품을 제대로 느껴볼 수 있는 전시《기산 풍속화에서 민속을 찾다》특별전을 선보이고 있다.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 생몰년 미상)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화가로, 부산의 초량을 비롯하여 원산, 인천 등 개항장에서 활동했고, 우리나라 최초로 번역된 서양 문학작품인 『텬로력뎡』(천로역정, 天路歷程)의 삽화를 그렸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그런데 왜 기산의 풍속화로 이번 전시를 열었을까. 앞서 밝혔듯 기산의 그림은 예술적으로는 분명 단원이나 혜원에 미치지 못하여 일반인에게는 생소한 화가이지만 그는 생업과 의식주, 의례, 세시풍속, 놀이 등 전 분야의 풍속을 그려내어 미술사, 민속학 등 관련 분야 연구자들에게는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일반인들은 왜 그에 대해서 알 수 없었던 것일까 그가 그려낸 1,500여 점은 당시에 우리나라를 다녀간 여행가, 외교관, 선교사 등 외국인에게 많이 팔려나가서 현재 독일, 프랑스 등 유럽과 북미 박물관에 주로 소장되어 있다. 그의 작품이 대부분이 외국에 소장되어 있는 것은 시산의 그림 그리는 방식이라 말한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당시 한국을 찾은 서양인들의 주문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아마도 당시 이름난 화원들이 그려낸 작품은 그 수량도 많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눈에 비쳐진 이국적인 조선의 모습을 다양하게 담기에는 부족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186 점의 기산의 풍속화, 우리를 18세기 조선으로 이끌다. 무엇보다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작품은 우리에게도 너무나 생소한 작품들이라는 것이다. 특히 코로나19로 국제간 교류가 쉽지 않은 가운데 코로나19를 뚫고 박물관을 찾은 작품은 대다수가 해외 소장처의 작품들이라는 점이다. 특히 주목되는 그림은 독일 MARKK 소장 기산 풍속화 79점(원본: 71점, 복제본: 8점)과 외교관이자 인천에 세창양행(世昌洋行)을 설립한 상인인 에두아르트 마이어(Heinrich Constantin Eduard Meyer, 1841~1926)가 수집한 61점(이상 舊(구), 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 소장품)은 그림 주제가 다양한데다가 대부분 인물과 배경이 함께 그려져 있어 예술적·학술적인 가치가 매우 높다. 이 그림은 우리나라를 떠난 지 126년 만에 다시 한국 땅을 밟게 되는 것으로, 전체 실물이 공개되는 것은 한국 최초이다. 이처럼 기산이 120여 년 전 그려낸 조선의 풍경의 채색이 현재까지 그대로 살아 있어 당시 시대상을 고스란히 전달하고 있다. 이번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전시하는 기산 풍속화는 프랑스 국립기메박물관 소장품(모사본) 87점, 독일 MARKK(구 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 소장품 79점, 국립민속박물관 소장본 28점 등 총 186점이다. 프랑스의 국립기메박물관 소장품은 87점이 전시되는데, 원래 기메박물관 소장본은 170점으로 알려져 있다. 기메 소장품을 전체적으로 분류하면, 생업 28점(농업12, 상업16, 수공업29, 기타7), 사회생활 29점(형벌, 교통 운송, 과거, 천민 등 다수), 의식주 31점(의생활19, 식생활8, 주생활4), 일생의례 17점(상례 다수), 놀이와 여가 21점, 전문예인 8점, 세시풍속 11점, 종교와 신앙 10점 등이다. 대체로 생업, 사회생활, 의식주, 일생의례, 놀이, 세시, 민간신앙의 전 분야에 고루 나타난다. 일생의례에서 상례가 다수를 차지하며, 전문예인에서 탈춤이 상세하지만, 기녀에 대한 그림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 그림들은 당시 조선을 여행한 프랑스 샤를 바라(Charles Louis Varat, 1842∼1893)에 의해 수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일 MARKK(구 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 소장품은 79점이 전시되어 모든 작품이 전시되는 셈이다. 전체적으로 분류하면 생업 15점(농업 3, 상업 3, 수공업 9), 사회생활 18점, 의식주 29점(의생활 19, 식생활 8, 주생활 2), 일생의례 6점, 놀이와 여가 17점, 전문예인 16점, 세시풍속 6점, 종교와 신앙 5점 등이다. 여기에는 일부 중복 분류도 포함되어 있다. 수공업은 각종 장인들 위주이며, 의식주에서는 의생활이 다수이다. 소장품의 특징을 보면, 의식주, 놀이, 전문예인(기방), 종교(불교) 분야가 중심이다. 그런데 생업이 적고, 사회생활의 과거시험⋅천민생활, 일생의례는 매우 드문 편이다. 그 그림들은 독일인 마이어(H. C. Eduard Meyer, 1841~1926)가 운영하던 인천 세창양행을 통해 수집되었다. 마이어는 독일 함부르크 출신으로, 1884년 인천 제물포에 개설한 마이어양행의 지점인 세창양행을 통해 독일, 네델란드 등지의 유럽으로 기산 풍속화를 반출했다. 국립민속박물관 소장본 28점 또한, 2019년 수집한 그림으로, 놀이와 세시 7점, 생업 6점, 의생활 5점, 종교 2점, 일생의례 4점, 사회생활(형벌과 행차) 4점 등 전부 28점에 이른다. 대체로 독일 MARKK(구 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나 덴마크 코펜하겐박물관 그림과 일부 유사하고, 그 외에 여러 나라의 기산 그림과 유사성이 있다. 다른 지역의 기산 풍속화와 비교해 구도에 있어 좌우, 인물 숫자, 일부 행위가 바뀌는 정도이다. 그런데 일부 눈에 띄는 작품도 있다. <실 뽑고 베틀짜기> <원본 화제 이하 동일>(도판번호 대체!)는 독일, 프랑스, 러시아 소장품을 종합한 형태로서, 다른 지역 것보다 다채로우며, <신부 신행>(도판번호 대체!)은 덴마크, 독일 소장품과 유사하나, 가마 지붕에 호피가 없고, 좌우에 2인의 후행 인물이 추가된 것이 특이하다. <실타레 만들기>(도판번호로 대체!)는 덴마크 소장품과 유사하나, 인물이 더 많고 다채로운 것이 특징이다. 이 외에 이번에 전시되지 않았지만, 덴마크 국립코펜하겐박물관, 오스트리아 비엔나박물관, 러시아 국립모스크바동양박물관, 캐나다에도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기산 풍속도의 유형분류. -대분류(380종류) / 중분류(380종류) -생업(111) / 농업(21), 상업(30), 수공업(43), 광업(4), 어업(6), 수렵(3), 축산(4) -사회생활(54) / 교통⋅운송(8), 교육⋅과거(10), 양반관리(6), 형벌(15), 의술(1), 하층민생활(14) -의식주(71) / 의생활(40), 식생활(20), 주생활(11) -일생의례(27) / 혼례(8), 상례(15), 제례(3), 잔치(1) -놀이, 여가(36) / 기원적놀이(4), 두뇌개발형 놀이(8), 신체단련형놀이(5), 겨루기형놀이(4), 내기성놀이(4), 오락과 여가(11) -연희(40) / 재인광대패(15), 탈놀이패(9), 기녀(16) -세시풍속(16) / 정초(2), 상원(5), 청명과 한식(2), 단오(3), 여름세시(1), 추석(1), 겨울세시(2) /종교(25) / 무속(8점), 마을신앙⋅점복⋅풍수(7점), 불교(10점) 기산의 그림은 아직 파악되지 않은 작품이 있어 전체를 본 사람은 없을 정도라 한다. 위 분류는 2006년 당시 파악된 1,400점 중에 외국 소장본 7곳, 한국 소장 1곳, 8곳의 709점을 대상으로 분류된 것이다. 정형호(문화재청 무형문화재위원) 이번 국립민속박물관의 전시는 1, 2부로 나눠 기산의 풍속화를 살펴보고 있다. 먼저 1부 ‘풍속이 속살대다’(속살대다: 남이 알아듣지 못하도록 작은 목소리로 자꾸 이야기하다)에서는 사람과 물산(物産)이 모이는 시장과 주막, 그 시장에서 펼쳐지는 소리꾼, 굿중패, 솟대장이패의 갖가지 연희와 당시 일상 생활품(갓, 망건, 탕건, 바디, 짚신, 붓, 먹, 옹기, 가마솥)을 만드는 사람들, 글 가르치는 모습, 과거(科擧), 현재의 신고식과 유사한 신은(新恩) 신래(新來), 혼례와 상·장례 등의 의례, 널뛰기와 그네뛰기, 줄다리기와 제기차기 등의 세시풍속과 놀이, 주리 틀고 곤장 치는 혹독한 형벌 제도 등 등 기산의 풍속화가 우리를 18세기 조선으로 이끌고 있다. 이들 작품 중 독특한 점은 한 공간의 순간을 그려낸 것이 아니라 시간을 달리하는 장면을 한 공간에 담아내었다는 점이 이채롭다. 또한, 그림 가운데 ‘그네뛰기’, ‘베 짜기’처럼 주제가 유사하지만, 서로 다른 인물과 구도의 풍속화, 예물 보내는 모습부터 친영 행렬, 초례, 신부 행렬에 이르기까지 혼례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은 마치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2부 ‘풍속을 증언하다’에서는 19세기 말 20세기 초 기산 풍속화와 그 속에 등장하는 기물(器物)을 통해 변하거나 변하지 않은 민속의 변화상을 찾아보고 있다. 그림 속에는 사라진 기물도 있고, 모양과 재료, 사용 의미가 변했지만, 기능이 남아있는 것도 있으며, 형식은 바뀌면서 여전히 의식이 이어지는 의례도 있다. ‘수공업(갈이장이, 대장장이)’, ‘식생활(맷돌, 두부, 물긷기), ’놀이(바둑, 장기, 쌍륙), ‘연희(삼현육각, 탈놀이), ’일생 의례(혼례)‘, ’의생활(모자, 다듬이질), ‘사회생활(시험, 합격)’의 7개 주제를 중심으로 기산 풍속화, 사진엽서, 민속자료, 영상을 통해 쇠퇴하거나 변화하고 지속하는 민속의 특성을 소개되고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의 풍속을 그려낸 달력이나 연하장을 쉽게 만나볼 수 있었다. 하지만 미디어의 발전으로 놀이 문화가 변하면서 급격히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러나 우리의 DNA는 여전의 그것을 품고 있다. 비록 현재는 쉽게 접할 수 없는 모습들이지만 이번 국립민속박물관의 《기산 풍속화에서 민속을 찾다》특별전은 시대의 변화로 잊고 있던 우리의 문화(민속)의 DNA을 다시 일깨우기에 부족함이 없는 전시라 하겠다. 전시는 오는 10월 5일(월)까지 진행된다. [허중학 기자]
국립중앙박물관, 19세기 에도시대 일본 수묵화의 대가 다니 분초의  공개
국립중앙박물관, 19세기 에도시대 일본 수묵화의 대가 다니 분초의 공개
[서울문화인] 국립중앙박물관이 재개관을 맞아 올해 첫 일본실 상설전시 교체를 진행하면서 2017년 구입한 에도시대 19세기 작품 <포도다람쥐병풍(葡萄栗鼠圖屛風)>을 최초로 공개하였다. <포도다람쥐병풍>은 일본 에도시대 후기의 대표적인 남화가(南畫家)이자 일본 수묵화의 대가 다니 분초(谷文晁, 1763-1841)가 1834년에 제작한 6폭 병풍 한 쌍이다. 남화가는 중국 남종화(南宗畫)를 일본적으로 해석한 일종의 문인화로 이번에 선보이는 병풍은 먹의 농담을 조절하며 포도나무 줄기와 대나무를 대담하게 표현하고 금가루를 뿌려 세부를 장식했다. 전체적으로 여백을 활용해 서정적인 느낌을 주고 있지만 세밀하게 묘사된 털과 쫑긋 세운 귀를 가진 다람쥐가 눈길을 끈다. 포도와 다람쥐는 일본에서 복과 다산, 장수를 의미하여 회화, 공예품 등 다양한 미술품의 주제로 애호되었다. 포도와 다람쥐는 조선시대 예술품에서도 자주 묘사되었는데, 다니 분초는 서양화와 조선회화 등 다양한 분야의 회화에 관심이 많았고 조선시대 포도그림을 모사한 적도 있었다. 따라서 이 병풍은 화가의 조선회화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이와 함께 후지이 간분(藤井觀文, 1888-1973)가 1938년 제2회 신문전(新文展)에 출품했던 칠기 <포도다람쥐상자(栗鼠手筥)>도 함께 선보인다. 이 상자는 붉은 칠 바탕에 나전(螺鈿)으로 포도알을 표현하고 침금(沈金)기법으로 다람쥐를 표현했다.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된 다섯 마리의 다람쥐는 사생을 중시한 작가의 성향을 잘 보여준다. 쟁금(脈金)이라고도 하는 침급기법은 옻칠을 한 표면에 칼로 문양을 새기고 그 새겨진 홈에 옻칠을 메겨 옻이 마르기 전에 금박이나 금분을 솜으로 문질러 부착시키고 마른 다음 위로 삐져나온 부분을 닦아내어 금빛으로 문양이 나타나게 하는 칠공예 기법이다. 한편, 이번 정기교체는 영상으로도 제작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공개 중이다. 직접 박물관을 방문할 수 없는 관람객이 안방에서 즐길 수 있도록 담당 학예사가 유물에 대해 직접 설명하는 내용을 담았다. [허중학 기자]
[박물관] 노랫말을 통해 살펴보는 우리 대중가요 100여 년 역사
[박물관] 노랫말을 통해 살펴보는 우리 대중가요 100여 년 역사
[서울문화인] 음악(音樂)은 소리를 재료로 하는 예술이다. 그러나 그 보존 및 표기는 시각적인 매체인 악보, 또는 문자를 사용한다. 가사가 존재하지 않는 음악도 있지만 대중가요에는 반드시 가사가 존재한다. 우리는 흔히 가수와 그 노랫말을 기억을 하여도 그 노랫말을 만들어낸 작사가를 기억하기란 쉽지가 않다. 물론 가수가 직접 노랫말을 쓰는 경우도 드문 경우는 아니다. 우리의 대중가요의 초창기에는 노랫말을 전문적으로 짓는 작사가가 따로 있었다기보다는 당대의 문인이나 예술가들이 노랫말도 함께 쓰는 식이었다. 노랫말을 ‘가요시’, ‘노래시’라고도 불렀을 만큼 시가 곧 노랫말이고 노랫말이 곧 시가 될 수 있었던 시기였다. 국립한글박물관이 우리의 대중가요의 역사에서 대중가요 앨범이나 가수가 아닌 대중가요의 ‘노랫말’을 본격적으로 다룬 특별전 <노랫말-선율에 삶을 싣다>를 지난 15일부터 선보이고 있다. 그간 대중가요를 주제로 한 다양한 전시가 열렸지만, 대중가요 앨범이나 가수가 아닌 대중가요의 ‘노랫말’을 본격적으로 다룬 전시는 이번이 처음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대중가요로 알려진 <낙화유수>(1929년)부터 진정성 있는 노랫말로 전 세계의 사랑을 받고 있는 방탄소년단(BTS)의 <IDOL>까지 총 190여 곡의 대중가요 노랫말과 더불어, 각종 대중가요 음반․가사지․ 노랫말 책․축음기 등 총 206건 222점의 전시 자료를 소개하고 있다. 전시장은 1부 ‘노랫말의 힘’, 2부 ‘노랫말의 맛’으로 구성되었다. 1부 ‘노랫말의 힘’에서는 192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약 100여 년에 이르는 대중가요 노랫말의 변화와 각 시기별 특징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으며, 2부 ‘노랫말의 맛’은 대중가요 노랫말에 담긴 말과 글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졌다. 외국의 노랫말을 번안하여 새롭게 쓴 우리의 노랫말부터 시로 쓴 노랫말까지 다양한 언어문화적 주제로 노랫말의 맛을 느껴 보고, 평범한 일상의 언어가 아름다운 한 편의 노랫말로 태어나는 과정도 살펴볼 수 있다. 대중가요의 노랫말은 대중을 위해 생산되고 대중에 의해 소비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이야기와 정서를 담고 있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서 다뤄지는 소재와 내용에는 차이가 있었다. <낙화유수>는 본래 무성 영화 <낙화유수>(1927년)의 주제가였다. 무성 영화에서 극의 진행 및 등장인물의 대사를 관객에게 설명하는 변사(辯士) 김서정(金曙汀, 1898~1936)이 곡과 노랫말을 지었는데, 대중에게 큰 인기를 끌어 1929년 정식으로 음반이 발매되었다. ‘강남 달이/밝아서/임의 놀던 곳’, ‘물망초 핀/언덕에/외로이 서서’와 같이 각 행의 글자 수를 맞춰 시 같은 느낌을 준다. 음율에 맞춰 앞 구절과 뒷 구절을 띄어쓰기 없이 한 덩이처럼 적거나, ‘물에 ᄯᅳᆫ’, ‘ᄭᅢ울 ᄯᅢᄭᅡ지’처럼 오늘날 사용되지 않는 표기 방식을 사용하는 특징도 볼 수 있다. “사공의 뱃노래 감을 거리며 삼학도 파도깊이 숨어드는 때”로 시작되는 <목포의 눈물>은 1935년 초 오케레코드사가 개최한 전국 ‘향토 찬가’ 모집에서 당선된 것이다. 겉보기에는 임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에 관한 노랫말로 읽히지만, 이 노랫말의 진가는 2절에 숨어 있다. “삼백연 원안풍은 노적봉밑에 임자최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임그려 우는마음 목포의노래” 2절의 ‘삼백연(三栢淵) 원안풍(願安風)은’은 본래 ‘삼백년 원한 품은’이었다. 이는 노래가 만들어진 1935년으로부터 삼백 년 전 무렵에 일어났던 임진왜란(1592~1598년)을 암시한 것이다. 노랫말에 등장하는 ‘임’ 역시 화자가 사랑하는 연인이기보다는, ‘조국의 광복’을 비유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어로 이해되면서 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우리말의 표기와 발음을 미묘하게 변형한 노랫말로 민족의 설움을 달래 주었던 <목포의 눈물>은 음반 발매 당시 5만 장 이상이 판매될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이처럼 1920년대부터 1945년 이전까지는 식민 지배 아래에서 대중이 겪은 설움과 울분을 비유적인 단어들로 표현하는 시 같은 노랫말이 유행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대중가요로 알려진 <낙화유수>(1929년)와 일제의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 노랫말을 수정한 <목포의 눈물>(1935년) 등이 대표적이다. 1950년을 전후로 한 시기에는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위로한 <단장의 미아리 고개>(1957년 추정)와 미8군 쇼 등을 통해 들어온 이국적인 지명과 리듬을 섞은 <늴리리 맘보>(1957년) 같은 노랫말이 인기를 얻었다. 1960~70년대에는 도시의 화려한 성장과 이상을 표현한 <임과 함께>(1972년),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오는 소외감이나 고향에 대한 향수를 표현한 <고향역>(1972년) 노랫말이 동시에 유행하기도 하였다. 1970~80년대에는 포크송과 발라드가 유행하면서 <아침이슬>(1971년)처럼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보이거나 <사랑하기 때문에>(1987년)처럼 서정적인 노랫말이 대중에게 큰 반응을 얻었다. 1990년대 이후 대중을 대상으로 한 문화적 표현이 한층 자유로워지고 한류, K-pop 등 전 세계를 무대로 한 노래가 주목받게 되면서 노랫말의 주제와 성격도 이전 시대에 비해 훨씬 다양해졌다. 최근에는 ‘나’를 사랑하고 ‘나’를 표현하라는 자존감과 정체성을 강조한 노랫말들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큰 공감을 이끌어 내고 있다. 또한, 국립한글박물관은 이번 전시의 기획을 위해 192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약 2만 6천 여 곡의 노랫말에 사용된 단어의 빈도를 분석한 결과 시대를 불문하고 노랫말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사용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어 말, 사람, 눈물, 마음, 가슴, 세상 등의 단어가 상위 빈도 단어가 들어 있었다. 이에 전시장에서는 사랑의 감정을 직관적으로 보여 주는 다양한 장르의 노래 19곡을 믹싱하여 소개하고 있다. 믹싱한 노래는 노랫말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연출 영상 및 조명과 함께 즐기도록 하였다. 또한 전시장 끝에는 노랫말에서 계절감이 듬뿍 느껴지는 <처녀총각>(1934년), <해변으로 가요>(1970년),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1966년), <겨울아이>(1980년) 등 16곡을 믹싱하여, 사계절의 변화를 담은 우리나라 명소들의 사진과 함께 제공한다. 더불어 박물관 2층 카페(ㅎ카페)에 DJ박스를 설치하여 전시 기간 동안 매일(11:00~16:00) 추억의 음악다방을 운영한다. 평일에는 1970~90년대 애창곡 30곡을 선정하여 틀어 주고, 주말ㆍ휴일(12:00~15:00)에는 신청곡을 받아 노래를 틀어 준다. 음료와 함께 신청곡을 즐기면서, 코로나19로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 모처럼의 여유를 즐길 수 있다. 또한 전시와 관련된 노랫말 문제 풀이 행사도 함께 진행한다. 한편, 이번 전시에는 박남정의 <사랑의 불시착>(1988), 주현미의 <짝사랑>(1989), <잠깐만>(1990) 등을 작사한 이호섭이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전시장에는 작사가 지명길(최진희 <사랑의 미로>(1984), 혜은이 <파란나라>(1985), 이지연 <난 사랑을 아직 몰라>(1987) 등 작사)과 이호섭이 192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노랫말과 삶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삶의 노랫말, 노랫말의 삶’ 영상이 마련되어 있다. 노랫말의 100여 년 역사 한 자리에 만나볼 수 있는 이번 전시는 오는 10월 18일까지 진행된다. [허중학 기자]
[문화평] 국립창극단, 10년 전으로 다시 되돌아가려나...
[문화평] 국립창극단, 10년 전으로 다시 되돌아가려나...
[서울문화인] “다양하게 보여주고 싶지만 욕심이다. 임기 3년 동안 다섯 바탕(판소리)은 힘들다. 작품은 전통을 고집하려고 한다. 하지만 1년에 한 작품은 현대적인 작품을 하려고 한다. 지난번 안드레이 서반의 ‘춘향’은 혼란스러웠다. 이런 방향으로 간다면 우리의 뿌리가 흔들릴 수도 있겠다. 조금은 지루할 수 있겠지만 재대로 우리의 소리를 전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난해 국립창극단 예술 감독에 부임한 유수정 감독이 코로나19로 뒤늦게 첫 신작 ‘춘향’을 선보이는 자리에서 앞으로 국립창극단의 방향성을 알 수 있는 대답이었다. 여기에 ‘춘향’의 대본과 연출을 맡은 김명곤 연출은 “실험적인 작품은 연극이나 뮤지컬에서도 보여줄 수 있다. 창극단은 창극단이 되어야 한다. 창극은 판소리를 기본으로 해야 한다.”라며 유수정 감독과 결을 같이 했다. 유수정 예술 감독은 1987년 국립창극단 단원을 시작으로, 창악부장, 수석요원 역임하고 국립창극단 예술 감독을 역임하게 되었을 정도로 창극단과 함께 해 왔다. 그러나 지난 수년 동안의 출연한 작품에서 혼란스러웠다는 이 날 말에는 과거 전통적인 창극에 목말라 있다는 것을 느꼈다. 여기에 전 예술 감독은 전통 판소리를 한 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럼 왜 이런 말이 나왔을까? 전임 예술 감독 김성녀(재임기간 : 2012.01.01 ~ 2019.03.11.) 기간에 선보인 작품은 한마디로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여 왔다. 이연주의 <맥베스 부인>, <내 이름은 오동구>, <변강쇠 점 찍고 옹녀>, <안드레이 서반의 다른 춘향>, <코카서스의 백묵원>, <숙영낭자전>, <아비. 방연>, <오르페오전>, <트로이의 여인들>, <산불>, 어린이창극 <미녀와 야수>, <우주소리>, <패왕별희>까지 제목에서 보듯 그동안 국립창극단에서 전혀 선보이지 않은 소재의 작품들이다. 물론 판소리 다섯 마당을 배제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1962년 창단 이후, 50년 간 판소리 다섯 마당을 위주로 선보여온 국립창극단의 입장에서는 파격이었다. 호불호가 있었다고 하지만 관객보다는 판소리계에서 그 목소리가 컷 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대가 달라진 만큼 객석도 달라졌다. 나이든 분들이 보는 공연이라는 분위기가 객석에는 젊은 층이 늘어났고 매진을 이룬 공연이 늘어갔다. 그러던 중에 <국립창극단 ‘변강쇠 점 찍고 옹녀’, 프랑스 관객을 매혹시키다>, <김성녀 ‘실험’ 파리에서 통했다>, <파리 관객 매혹시킨 옹녀, 창극 세계화 길을 열다>, <국립창극단의 '트로이의 여인들', 영국·네덜란드·오스트리아 투어 공연>.... 등 언론은 그녀의 새로운 시도에 찬사를 보냈다. 과거 김성녀 전 예술 감독에 “왜 이런 실험적인 작품을 계속하는가”라고 질문을 던졌더니 “관객들이 또 ‘춘향’이냐, ‘수궁가’야 객석에는 나이든 어르신들만 있고 젊은이들은 볼 수가 없다. 관객이 찾아오지 않은 공연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이라는 답변을 하였다. 나 또한 아주 젊은 층은 아니다. 오십 줄에 들어서면서 ‘창극’을 보러가야지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창극’의 애호가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있다. 전통 판소리를 하는 일부 사람들에게는 관객이 많이 찾아오는 것보다는 전통을 고수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생각했을 것이란 거다. 이는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한복’에서도 찾을 수 있다. 과거에는 중요한 행사나 명절에는 한복을 입어왔지만 점점 명절에도 한복은 외면을 받기 시작했고 거리에서 한복은 거의 자취를 감췄다. 그때 등장한 것이 ‘개량한복’이다. 그러나 이때도 논란은 있었다. 그리고 개량한복의 인기도 반짝했다. 그러나 다시 한복 붐이 생긴 것은 전주한옥마을에서 한복대여의 인기에 힘입어 이제 경복궁을 중심으로 4대궁 주변이나 북촌, 삼청도 거리에서 한복 입은 관광객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수십 년 동안 이런 풍경은 없었다. 그러자 다시 논란이 일었다. ‘이것은 전통 한복이 아니다.’라는 논란이다. 거기에 질 떨어지는 동남아에서 제작 논란이다. 개인적으로 거기에 답변을 해주고 싶다면 전통 한복을 만드시는 분들도 전통 한복을 만들어 ‘대여사업’을 통해서 한복 장려에 동참했으면 싶다. 그렇게 한다면 아마 시간당 대여비가 지금의 몇 배, 또는 수십 배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도 지금의 풍경을 볼 수 있을까... 전통적인 한복 누가 봐도 아름답고 지켜나가야 할 우리의 유산이다. 하지만 생활 속에서 자릴 잡지 못하면 박물관 유물로 남게 될 것이다. 창극 또한 마찬가지라 생각이 된다. 변형된 것을 한다고 전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변형을 봐야 전통을 궁금해 하고 다시 찾게 되는 것이다. 요즘 ‘트롯’ 열풍에서 보듯 한 때는 나이든 중년들이 찾는 음악이라 치부하던 시기가 있었다. 판소리도 유행가이다. 젊은 층이 찾아야 그 명맥을 계속 유지해 나가고 이어질 수 있다. 왜 국립창극단이 과거로 되돌아가려고 것에 대해 이해는 간다. 하지만 그동안의 새로운 시도와 변화에 대해 부정해서는 안된다. 유수정 예술 감독은 1987년 국립창극단 단원하여, 창악부장, 수석요원 역임하고 국립창극단 예술 감독을 역임하게 되었을 정도로 창극단과 함께 해 왔다. 그러나 지난 수년 동안의 출연한 작품에서 혼란스러웠다는 말에는 과거 전통적인 창극에 목말랐을 것이다. 더군다나 전 예술 감독은 전통 판소리를 한 분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국립창극단 누리집에 국립창극단의 소개 글이다. ‘창극이란 무엇인가’ 끈질기게 자문하며 오늘의 창극 만들다. 국립창극단은 1962년 창단 이래 한국 고유의 노래인 판소리를 바탕으로 한 음악극 ‘창극(唱劇)’을 선보이고 있는 국립극장 전속 예술단체이다. 창단 이후 55여 년간 판소리 다섯 바탕(춘향가・심청가・흥부가・수궁가・적벽가)의 노래와 사설을 온전히 따라가는 전통적 스타일의 창극 무대를 꾸미며 애호층을 형성해왔다. 2012년 레퍼토리 시즌의 도입부터는 창극이 다루지 않았던 다양한 소재들을 국내외 저명 연출가 중심으로 창극화했다. 기존과는 사뭇 다른 행보로 그 어느 때보다도 창극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있으며 공연계 안팎으로 대단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행보와 동시에 국립창극단은 사라진 판소리 일곱 바탕의 이야기를 창극화하는 ‘판소리 일곱 바탕 복원시리즈’도 지속적으로 추진 중일 뿐만 아니라, 국립창극단은 창극의 토대가 되는 판소리 보존에도 힘을 쏟아 전국 각지의 명창들이 꾸미는 <완창판소리> 무대를 30년 넘게 선보이고 있다. 앞으로도 국립창극단은 오늘날의 다양한 관객과 소통 하는 일에 매진, 세계 속에서 우리 음악극 창극의 위상을 높이 세우고자 한다. [허중학 기자]
국립중앙박물관, 왁자지껄한 조선의 삶을 그린 김홍도의 풍속화 7점 공개
국립중앙박물관, 왁자지껄한 조선의 삶을 그린 김홍도의 풍속화 7점 공개
[서울문화인]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는 수없이 많지만 김홍도(金弘道, 1745~1806) 만큼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화가도 드물 것이다. 또한, 그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진 <씨름>, <무동>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작품은 국내외 주요전시에 출품 요청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회화의 경우 작품의 보존의 문제로 자주 만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화첩의 경우 한 번에 여러 점을 감상하기 어려웠다. 그런 가운데 국립중앙박물관이 재개관과 함께 상설관 2층 서화실에 <씨름>, <무동>, <논갈이>, <활쏘기>, <노상 풍경>, <베짜기>, <그림 감상> 등 《단원풍속도첩》의 작품 7점을 시작으로 순차적으로 공개된다. (2차(9월 중순) : 서당, 빨래터, 담배썰기-우물, 기와이기, 탁발승 (6점), 3차2021년 1월) : 타작-자리짜기, 대장간, 주막, 고누놀이, 행상 (6점)) 현장의 활력을 고스란히 담아낸 풍속화 김홍도는 도화서 화원으로 활약하며 산수화, 화조화, 도석인물화 등 다양한 화목(畫目)의 그림을 제작했다. 그는 대부분의 장르에서 뛰어난 그림 실력을 보였는데 그 중 서민의 삶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린 풍속화로 널리 알려졌다. 김홍도의 스승인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은 “김홍도는 사람들이 날마다 하는 수천 가지의 일을 옮겨 그리길 잘했으니, 한번 붓을 대면 사람들이 다들 손뼉을 치면서 신기하다고 외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그의 그림은 감탄을 자아냈다. 강세황의 말처럼 김홍도의 그림은 현장의 핵심을 꿰뚫었고 인물들의 희노애락을 재미있게 표현하여 당대에도 인기가 대단하였다. 김홍도는 서민의 생업 현장이나 놀이, 휴식, 길거리의 모습 등 평범한 일상사를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냈다. 김홍도는 배경을 생략하고 주제에 집중한 구도를 사용했다. 또한 간결하고 힘있는 필선과 맑은 담채로 풍속 장면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서민들의 놀이문화를 그린 〈씨름〉과 〈무동〉은 명작으로 꼽힌다. 김홍도는 <씨름>에서 원형구도를 사용하여 중앙에 씨름꾼을 그리고, 주변에 구경꾼을 그려 넣었다. 바닥에 편안하게 앉아 관전하는 인물들의 배치와 저마다의 생생한 표정 덕분에 감상자도 마치 씨름을 직접 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무동>에서는 악사들의 연주에 맞춰 춤을 주는 어린 아이의 춤사위에 저절로 어깨가 들썩인다. 조선 사람들은 놀 때뿐만 아니라 고된 일을 할 때에도 활기가 넘쳤다. <논갈이>에서는 두 명의 농부가 밝은 표정으로 겨우내 언 논바닥을 갈아엎고 있다. 힘든 농사일이지만 쟁기를 끄는 소들의 활기찬 움직임이나 웃옷을 벗고 땀흘리는 일꾼의 모습은 노동 현장의 건강한 활력을 잘 전달한다. 인물간의 심리를 재치있게 포착하다 김홍도는 마치 스냅사진을 찍듯, 현장의 순간을 포착하면서 인물간의 심리도 놓치지 않았다. <노중풍경>은 길거리에서 부딪친 일행을 묘사한 그림으로, 매우 드문 소재이다. 김홍도는 나귀를 타고 다니며 직접 본 조선의 풍정을 8폭 병풍에 담았는데 <행려풍속도병>(1778)에는 <노중풍경>과 유사한 장면이 포함되어있다. 섬세하게 산수와 인물을 그린 병풍 그림과는 달리, 화첩 그림에서는 배경 없이 주요 장면만을 간결하게 묘사하였다. 말을 탄 젊은 선비는 맞은편의 앳된 아낙을 부채 너머로 은근슬쩍 훔쳐보고 있고,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아낙은 부끄러운 듯 장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이들 사이의 미묘한 심리와는 관계없이, 중년의 가장은 아이와 닭이 든 짐을 메고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활쏘기>에서도 인물간의 흥미로운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침착한 표정의 교관은 활쏘는 인물의 자세를 교정해주고 있고, 활시위를 당기는 이는 곤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 이들의 훈련과는 관계없이 오른편의 인물들은 화살과 활시위를 각각 점검하며 자신의 일에 몰두해있다. 왁자지껄한 조선의 삶을 그린 김홍도의 풍속화는 내년 5월까지 감상할 수 있다. 일 년간 두 차례의 교체전시를 통해 총 19점의 그림을 볼 수 있다. 현재 만날 수 없는 작품에 대한 아쉬움은 대형 스크린 영상을 통해 만나볼 수 있다. [허중학 기자]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13년 만에 판화을 주제로 대규모 전시가져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13년 만에 판화을 주제로 대규모 전시가져
[서울문화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13년 만에 개최하는 대규모 판화 주제전’이라는 타이틀에서 알 수 있는 그동안 미술관에서 ‘판화’를 소재로 전시를 많이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술사에서 판화가 가지는 가치가 크지 않아서 일까. 그것은 분명 아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지난 14일부터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는 대규모 판화 기획전 《판화, 판화, 판화》에서 미술관 측이 ‘판화’라는 단어가 거듭 반복되는 전시명에 대해 판화의 특징 복수성을 담아내고자 붙여진 것에서 알 수 있듯 아마 원본에서 여러 판을 찍을 낼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장르의 작품에 비해서 가격이 낮게 평가되고 있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결국 그것은 미술관에서도 판화 작품을 주목하지 않게 되다보니 많은 소장품이 없고 결국 이는 대중들에게도 잊혀 가는 장르가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우리에게 판화는 다른 어떤 장르보다 쉽게 접할 수 있는 장르의 미술이었다. 그것은 흔히 바로 민중미술, 즉 시민들의 목소리를 내는데 판화라는 기법을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판화’의 특징 바로 재생산이 쉽다는 특징은 당시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확산시키는 일종의 미디어로 기능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대부분의 나라에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지난해 과천관에서 한국, 일본, 싱가포르 3국 협력 프로젝트로 진행된 《세상에 눈뜨다: 아시아 미술과 사회 1960s-1990s》전은 한국, 일본, 싱가포르 외에도 중국, 타이완,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태국, 인도, 미얀마, 캄보디아 등 아시아 13개국의 주요 작가 100명의 작품 170여 점이 선보이는 대규모 순회전이었다. 당시 그 전시를 통해 그동안 쉽게 접할 수 없었던 동아시아의 현대미술을 접할 수 있었다는 점 이 외에 큰 수확이 있었다면 바로 시기적으로는 조금 그 차이는 있지만 당시를 추억하는 저에겐 판화적 성격의 동아시아 민중미술의 형태는 거의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굉장히 뜻 깊은 자리였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치적으로나 인권에 대한 의식은 조금씩 그 때와는 진일보 했고 무엇보다 기술과 환경의 변화로 미디어의 다양화로 판화는 그 자리를 점점 내어주게 되었다. 그 사이 미디어아트, 융복합 예술 등 새로운 동시대 미술의 홍수 속에서 설 자리는 더욱 약화되었다. 그렇다고 미술의 장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변화 속에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이번 과천관의 판화 전시는 국내 현대 판화를 대표하는 작가 60여 명의 작품 100여 점을 통해 시대에 따른 ‘판화’의 기법과 주제를 양상을 통해 우리가 기억하는 판화가 어떻게 변화하여 진행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자리이다. 미술관 측은 이번 전시를 ‘책방’, ‘거리’, ‘작업실’, ‘플랫폼’ 4가지 구성, 우리 주변에서 익숙하게 접해왔던 장소의 명칭과 특징을 빌려와 판화가 존재하고 앞으로 나아갈 자리들을 장소의 개념으로 조명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이번 전시를 바라보는데 중요한 요소는 아니라고 판단된다. 물론 전시를 무작정 펼쳐 놓을 수는 없으니 구분해서 보여줄 필요성은 있다. 먼저 ‘책방’에서는 판화로 제작된 아티스트 북을 비롯하여 인쇄문화와 판화의 관계를 나타낸 작품들을, ‘거리’에서는 사회적인 이슈와 판화의 만남을 통해 예술이 일종의 미디어로 기능했던 작품들을 선보이고, 작업실’에서는 타 장르와 구분되는 판화의 고유한 특징인 다양한 판법들을 대표하는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플랫폼’에서는 언 듯 이것이 판화인가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즉 동시대 미술의 장르의 하나에서 확장된 판화의 면모를 만날 수 있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이번 ‘판화’전을 통해 한국 판화가 지닌 가치를 재확인하고, 소외 장르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가능성에 대한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듯 미술관이 시대를 앞서서 새로운 장르의 전시를 대중들에게 선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미술관이 외면하면 또한 그 장르가 잊혀 진다는 것도 인지를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린 이 전시를 봐야할 이유가 되었다. [허중학 기자]
[박물관] 40년 만에 광주를 떠나 서울을 찾은 80년 5월의 기억들
[박물관] 40년 만에 광주를 떠나 서울을 찾은 80년 5월의 기억들
[서울문화인] 광주사태, 과거 전두환 정권 신군부를 지지하는 일부 우파 인사들은 여전히 이 단어를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도 이 단어가 은연 중 나오는 것은 오랫동안 이 명칭이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당연히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라는 공식 명칭으로 불리어 지지만 그 길이 쉽지만은 않았다. 1980년 5월 21일에 계엄사령관 이희성이 “광주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나고 있다.”라는 발표가 언급된 이후 신군부와 관변 언론 등에 의해 ‘광주 소요사태’ 또는 ‘광주사태’ 등으로 보도되면서 일반화되었다. 그리고 이 호칭은 제5공화국 기간 내내 사용되면서 70년 대 이전을 살아온 국민들에게는 ‘광주사태’라는 용어가 익숙해져 버렸다. 현재 공식 명칭인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1988년 이후로 정부 산하 민주화합추진위원회가 사건을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하면서 나왔고, 이후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의 공식 언급에서도 이 명칭이 사용됨으로써 공식 명칭이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를 부정하며 논란이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정철된 ‘민주화 운동’의 가치는 시간이 더 흘러 1997년이 되어서야 ‘5.18민주화운동기념일’이 정부주관으로 거행되었고, 더 나아가 국제사회에도 인정을 받아 2011년 5월 25일에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기록들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되면서 우리의 것만이 아닌 모두가 보존해야할 가치를 인정받게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록유산들이 광주 지역을 제외하고는 의미 이외에는 이 유산들을 제대로 확인하기가 쉽지가 않았다. 그런데 40년이 지난 이제야 광주를 벗어나 서울의 중심지 광화문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이를 마주하게 되었다. 지난 13일 대한민국역사박물관(관장 주진오)과 함께 5·18기념재단(이사장 이철우), 5·18민주화운동기록관(관장 정용화), 전남대학교 5·18연구소(소장 최정기),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원장 이소연)까지 5개 기관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전시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이 개막했다. 이날 개막식에 참석한 각 기관장들은 한 결 같이 “늦었지만 5·18민주화운동 기록유산은 더 이상 광주 시민들만의 유산이 아니라 대한민국 모두의 유산”임을 강조했다. 이번 전시는 1980년 오월의 한 복판에서 이를 경험하고, 목격하고, 알린 사람들의 기록과 당시 그들을 탄압했던 정부와 군의 기록을 통해 5·18민주화운동이 한국 현대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이후 명예회복까지 정부 시각의 변화를 조명해보는 자리이다. 특히 시민들이 남긴 기록으로, 광주를 떠난 적이 없었던 자료가 서울에서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당시 초등학생‧고등학생‧대학생‧ 전도사‧주부 등 광주 시민들이 뜨거운 심장으로 당시의 상황을 써내려갔던 일기 16점을 비롯하여, 당시에는 언론 탄압으로 기사화되지 못했던 기자들이 남긴 취재수첩과 메모 5점을 통해 간접적이나마 당시 그분들의 감정을 느껴볼 수 있다. 전시는 3층과 1층 기획전시실에서 진행되고 있다. 먼저 3층 기획전시실은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이라는 주제로 1980년 5월 17일부터 27일까지 열흘 동안 광주에서 일어난 일들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다양한 기록물과 실물자료를 통해 40년 전 그 오월에 저마다의 자리에서 광주를 목격하고, 지키고, 알리려 애썼던 이들의 뜨거운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1층 기획전시실에서는 국가기록원이 소장한 5·18민주화운동 관련 대표적인 정부기록물로 이루어진 ‘정부기록 속의 5·18’전시로 이루어졌다. (정부기록물 전시는 2020년 6월 7일까지 열림) 이번 전시에서 공개되는 핵심 자료는 사람들이 남긴 기록이다. 수십 년 동안 꺼내지 못하고 서랍 속에 간직해 온 일기, 믿을 수 없는 광경을 취재했던 기자들의 취재수첩과 사진, 친지의 안부를 묻는 편지, 5.18 진상 규명을 위한 인터뷰 기록들, 그리고 광주시민에게 보내는 위로의 시와 작품 등 다양한 자료들이 오월의 고통과 충격을 증언한다. 특히, 국방부와 광주 동구청에서 생산한 상황일지를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각 날짜별로 재구성하여 당시 상황을 이해를 돕는다. 이와 함께 수습상황보고, 피해신고접수상황 등 세계기록유산 10여 점이 최초로 원본 전시되며, 국군기무사령부가 앨범으로 정리·보관하고 있었던 당시 사진집, 비상계엄선포, 계엄포고문 제10호 시달, 상황일지, 광주사태 수습 긴급 지시문, 피해신고 접수상황, 광주사태 수습 상황보고 등 정부기록 100여 점도 소개되고 있다. (명칭은 당시 정부에서 사용한 용어임) 박물관 외부 역사회랑에서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 사진을 비롯한 미디어 콘텐츠가 선을 보이며, 역사마당에는 최평곤 설치작가가 제작한 평화의 메시지와 위로를 건네는 5.18 상징 조형물이 지나가는 시민들과 마주하고 있다. 당시 복학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주진오 관장은 “서울에서 5·18민주화운동을 주제로 한 대규모의 전시가 개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감회가 남다른 한편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이 전시를 통해 5·18민주화운동이 광주의 역사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역사라는 것을 온 국민이 공감하길 바란다”면서 이번 전시의 의미를 강조했다. 국가기록원 이소연 원장은 “40년 만에 처음으로 서울에서 개최되는 5·18민주화운동 특별전을 통해 우리 국민들이 5·18민주화운동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라며, 남겨진 기록을 통해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에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며 이번 특별전의 의미를 밝혔다. 이번 특별전은 오는 10월 31일(토)까지 진행되며, 무료로 관람이 가능하다. [허중학 기자]
[박물관] 20세기 또 다른 역사의 사관, 문학으로 바라본 혼란기 서울의 모습
[박물관] 20세기 또 다른 역사의 사관, 문학으로 바라본 혼란기 서울의 모습
[서울문화인] 고대 역사의 기록자는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인 ‘서기’들의 몫이었다. 중세까지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특정한 집단, 지식층에 의해서 역사가 기록되어 지고 이를 통해 우리는 역사를 배우는 경우가 많다. 물론 기록유산이 아니더라도 유형의 유물이나 무형의 구전이나 관습을 통해 유추하기도 한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서서 역사의 기록자는 특정한 지식층만의 전유물이 아닌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역사의 기록자가 될 수 있어졌다. 그만큼 세상을 바라보고 기록할 수 있는 집단의 범위가 넓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역사의 정사, 야사의 구분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점이 다양해졌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럼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조선 시대에는 당파로 인한 폐단이 있었다면 20세기 왕조가 무너지면서 찾아 온 일제강점기, 해방을 했지만 이념으로 조국이 다시 나눠지고 그 속에서도 갈등은 계속되었다. 조선 시대 당파는 정치권의 분쟁이었다면 이제 국민적 분쟁으로 그 범위가 넓어졌다. 그리고 그것이 아직 유효하다보니 우린 근대사를 기피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자신들의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기록한 문학가들이 있다. 최근 서울역사박물관(관장 송인호)은 한국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벌어졌던 당시 역사를 역사학자나 정부의 기록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문학이라는 장르를 통해 그 시대의 서울과 서울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서울은 소설의 주인공이다’ 특별전을 선보이고 있다. 전시는 올해 한국전쟁 70주년과 4·19혁명 60주년을 기념하여 진행하는 전시인 만큼 해방과 한국전쟁과 4·19혁명, 그 순간을 포착한 24명 작가들의 문학작품 27편을 통해 해방에서 4·19혁명까지의 서울과 서울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살펴보고 있다. 동시에 관련 유물 500여 점도 함께 전시되어 역사성을 더하고 있다. 해방의 감격과 분단의 아픔, 혼란이 가득했던 서울 전시는 역사의 시간의 순으로 관객을 맞이한다. 먼저 만날 수 있는 것은 해방 이후, 한국전쟁 이전, 해방의 감격과 분단의 아픔, 혼란했던 서울의 모습을 시(詩)를 통해 만난다. 해방의 기쁨을 박종화의 시 「대조선의 봄」으로 느껴보고 그 기쁨 속에서도 안타까웠던 분단 현실을 이용악의 「38도에서」로 만나보자. 그리고 수많은 정치세력의 등장으로 혼란했던 서울을 오장환의 「병든 서울」은 고스란히 보여준다. 새 세상에 대한 기대의 좌절을 최태응의 소설 「슬픔과 고난의 광영」으로, 미군정 하에 영어를 매개로 새롭게 등장한 지배세력에 대한 풍자를 채만식의 「미스터 방」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이어 박완서 소설 『목마른 계절』과 『나목』을 통해, 한국전쟁 당시 점령과 수복이 반복되었던 서울의 모습을 돌아본다. 9·28수복의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벌어진 혹독한 부역자 처벌에 대한 배신감과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그해 10월에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를 맞게 된 서울 사람들은 ‘세상이 바뀌는 것’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아 필사적으로 피난을 가려고 한다. 박완서의 ‘목마른 계절’은 점령과 수복이 반복되었던 서울을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또한 한국전쟁기 서울 안에 공존했던 폐허와 번화함을 명동PX를 중심으로 이야기 한 ‘나목’을 통해 피폐함 속에서도 고통을 딛고 일어서는 사람들의 힘과 삶에의 열정을 느껴볼 수 있다. 특히 이 작품은 박완서와 화가 박수근이 실제로 미군PX 초상화부에서 함께 일했던 사실과 그의 작품 <나무와 두 여인>을 모티브로 하고 있어 더욱 유명한 작품이다. 그리고 1·4후퇴 전날 폐허가 된 텅 빈 서울을 노래한 조지훈의 「종로에서」와 추운 겨울, 뚜껑도 없는 화차를 타고 떠나는 고된 피난길에서 느끼는 미래에 대한 암담함과 딸에 대한 가련함이 담긴 박인환의 「어린 딸에게」도 소개되고 있다. 전시장에는 당시 PX의 내외부 모습과 주변의 거리를 재현하여 관람객들은 마치 한국전쟁기 서울의 한복판에 있는 듯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전후 재건·복구된 서울의 모습과 삶의 명암 환도 후 서울시는 전쟁으로 파괴된 서울의 복구와 재건을 서둘렀다. 서울로 몰려든 인구의 증가로 정부는 다양한 공영주택을 건설하였고 그 주택의 모습을 묘사한 김광식의 「213호 주택」을 통해 그 풍경을 살펴본다. 한편, 전후의 사회는 피폐와 곤궁함 속에서도 사치와 부패가 만연한 이중적인 모습이 공존하였는데 이를 이범선의 「오발탄」과 정비석의 『자유부인』을 통해 상반된 1950년대 서울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다. 6·25전쟁 이후 반공정책은 더욱 강화되었고 반공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자유’ 와 ‘민주주의’는 절대적인 가치가 되어 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의 칼날로 돌아오게 된다. 1960년 3월 15일 제4·5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둔 이승만 정권 말기의 분위기와 부정선거 모습이 잘 묘사된 강신재의 『오늘과 내일』을 통해 혁명 직전의 서울을 만날 수 있다. 『광장』을 쓰게 한 4·19혁명은 우둔했던 사람들도 시대의 문제에 대해 눈을 뜨면서 총명해지고, 영감이 부족하던 예술가도 새로운 발상으로 예술적 결과물을 내놓던 시대였다. 나는 단지 그 시대에 그 장소에 있었던 것뿐이고 역사가 비추는 조명에 따라 내 눈이 본 것을 글로 옮긴 것뿐이다. 개인에게 닥친 큰 사건에 대해 '문학'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통해 '시대의 서기'로서 쓴 것이다. - 최인훈, 등단 50주년 기념 기자회견에서 4·19혁명 전후 군중의 함성으로 가득 찬 서울 3·15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참가했다가 사망한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고 제2차 마산항쟁이 일어난다. 오상원의 「무명기」는 그로 인해 촉발된 1960년 4월 18일 고려대 학생 시위 당시, 시위대가 을지로4가 천일백화점 앞에서 정치깡패들에게 피습되었던 사건을 기자가 밀착 취재하는 형태로 생생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이를 통해 4·19혁명 전야의 서울 속으로 들어가 볼 수 있으며, 김수영, 신동엽, 송욱, 김춘수, 박두진, 황금찬등의 시인들의 작품을 통해 혁명의 함성을 들어볼 수 있다. 그리고 혁명의 격렬함이 절정을 이루었던 4월 25일 밤, 평화극장의 파괴현장을 극적으로 묘사한 박태순의 「무너진 극장」과 혁명이 남긴 것에 주목한 「환상에 대해서」를 통해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4·19혁명의 위상을 다시금 느껴볼 수 있다. 전시는 무형의 소설 텍스트만을 풀어낸 것이 아니라 한국전쟁과 4·19혁명을 잘 보여주는 시각적인 미술작품도 전시되어 있다. 이응노의 〈한강도강〉, 한묵의 〈꽃과 두개골〉과 〈십자가〉, 임인식, 김한용 작가의 한국전쟁기의 사진들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한편, 이번 전시 관람은 5월 31일까지는 사전예약제로 하루 최대 120명이 1층의 기획전시실만 관람 가능하다. 일 3회(회당 40명), 회당 2시간 관람 가능(1회차: 10시~12시/2회차: 13시~15시/3회차: 16시~18시)하다. 6월 5일(금)에는 박물관 홈페이지를 통해 VR온라인 전시로 만날 수 있다. <※ 예약 : 서울시 공공서비스예약(https://yeyak.seoul.go.kr), 박물관 인근 직장인들을 위해 점심시간(12시~13시)에 한해 현장접수 운영된다.> 또한, 전시에 소개되는 주요작품 10편을 소설가 김영하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다. 앱(큐피커)을 통해 작품낭독을 들어보고 관련 인터뷰 영상은 박물관 유튜브 채널을 통해 볼 수 있다. 김영하 작가의 낭독을 들을 수 있는 앱은 큐피커(QPICKER)로 구글 안드로이드 플레이스토어나 애플 앱스토어에서 검색하여 설치한 후 아래의 방법으로 들을 수 있다. 전시는 오는 11월 1일(일)까지 진행된다. [허중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