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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인] 사직단을 끼고 인왕산을 오르는 언덕길에 위치한 고택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조선 14대 왕 선조의 후손이자, 제12대 국회의장 운경(雲耕) 이재형(李載灐, 1914~1992) 선생이 1992년 작고할 때까지 39년간 거주하였던 운경고택(종로구 인왕산로 7)이다.
이곳에서 지난 15일부터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최정화 작가와 함께하는 <최정화: 당신은 나의 집> 전시를 선보이고 있다.
운경고택은 조선의 역사와 개인의 역사가 함께하던 곳이었다. 이곳은 조선 14대왕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이 살던 곳으로, 선조가 왕이 되자 사당을 지어 조상의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선조의 일곱째 아들인 인성군의 후손인 운경은 이곳이 도정궁(임금의 친족에 들어와 임금이 된 사람의, 임금이 되기 전의 시기. 또는 그 시기에 살던 집)터의 역사적 사실을 인지하고 조상의 체취가 남아있는 이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현재 이곳은 1993년 설립한 비영리 공익 (재)운경재단(이사장 강창희)이 장학 사업과 사회 공헌 사업을 비롯해 운경고택을 활용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지만 운경 선생 작고 이후 한동안은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 않은 공간이었다. 그러다 2019년부터 갤러리로 활용되면서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있다.
갤러리로 활용되면서 2019년 장응복, 하지훈 디자이너와 진행한 <차경 借景, 운경고택을 즐기다>를 통해 전통 한옥의 우수성과 운경의 철학을 대중과 나누었고, 2021년에는 플로리스트 무구를 초청하여 운경고택의 아름다움을 재해석한 <운경미감 雲耕美感 20201, 꽃, 집>을 진행하였다.
이번 전시는 올해 운경 이재형 30주기와 최정화 작가의 활동 30주년이 맞물려 있는 해로 운경재단은 최 작가와 최영 소설가와 함께 2년여에 걸쳐 기획하여 선보이는 전시이다.
1990년대 이래 한국 현대미술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해 온 작가 최정화는 다양한 일상적 물건들을 집적하거나 재배치함으로써 공예의 예술화 작품을 진행해온 만큼 이번 전시는 삶의 공간이었던 운경고택에 일상의 공예품을 각 공간의 쓰임새와 어우러짐이 그대로 스며지게 구성하였다.
고택에 들어서면 낡아 버려진 손수레, 플라스틱 바구니와 의자, 찌그러진 밥그릇, 누군가 덮던 이불 등이 최 작가의 30년간 작업해온 24점의 작품이 고택 곳곳에 가득하다. 언 듯 이것들은 400년 역사의 고택과 괴리감이 느껴질 수도 있을 법하다. 하지만 괴리감 보다는 30년간 삶의 손길이 멈춰진 공간에 다시 지나간 생명을 불어넣듯 그 아쉬움을 달래는 것 같다.
이미혜 운경재단 상무는 “대한민국 격동기 수십 년간 손님을 맞느라 분주했던 운경고택이 이제 모두에게 열린 공간으로 새로운 손님들을 맞이하고자 한다”고 밝혔듯 시공을 넘나드는 오브제의 반복과 축적으로 직조된 최 작가의 작품들은 근대의 역사를 오롯이 담고 있는 운경고택에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물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경험을 하게 하는 듯하다.
또한, 최영 소설가는 이번 전시를 위해 ‘메타픽션’ 형태로 소설 <춘야(春夜)>를 써 내려갔다. ‘복지오’라는 한 인물이 봄밤에 운경고택을 방문하여 겪게 되는 환상적이고 경이로운 이야기를 최정화의 전시작품과 운경고택의 풍경을 버무려 그려내고 있다. <춘야>는 전시 관람객에게 전시용 도록 대신 소설책 한 권씩 나눠주고 한옥 어디서든 차분히 앉아 읽을 수 있게 했다.
이번 전시는 6월 17일까지 진행되며 하루 5회 관람할 수 있다. 관람은 회당 16명으로 제한하고 1시간 20분의 관람 시간이 주어진다. 또한, 전시와 연계된 공공예술 프로젝트, 교육 프로그램 및 소외계층을 위한 놀이형 공예 워크샵도 진행된다. [허중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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