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 50년 만에 무령왕릉 출토유물 전체 처음으로 한자리에서 공개

국립공주박물관 무령왕릉 발굴 50주년 기념 특별전
기사입력 2021.10.14 14:07 조회수 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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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의 관꾸미개.jpg

 

 

 

[서울문화인] 1971년 7월 5일,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舊 송산리고분군)에서 배수로 공사를 하는 도중에 우연히 벽돌무덤 하나가 발견되었다. 무덤 입구에 놓인 지석을 통해 이 무덤의 주인공이 백제를 다시 강한 나라로 부흥시킨 제25대 무령왕(武寧王, 백제 제25대왕, 재위 501~523년) 부부임을 알려주었고, 무령왕릉의 출토된 유물을 통해 중국 남조와 관련된 것, 신라·왜와의 교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이 발견으로 백제사와 동아시아사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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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舊 송산리고분군)

 

 

공주시 금성동에 위치한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은 백제왕들의 무덤으로 20여기 이상이 자리 잡고 있으며, 현재 7기가 복원되어 있다. 이 중 무령왕릉과 송산리 6호분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벽돌무덤으로 아치형의 천장을 한 무덤방과 무덤길을 갖춘 구조이다. 전체 길이는 약 7.03m이다. 널길은 길이 2.83m, 너비 1.03m, 높이 1.52m인 좁은 통로로 되어 있고, 널길이 끝나면 바닥이 22cm 낮아져 널방이 나타난다. 1.05m를 지나면 다시 바닥면이 원래대로 높아져 관대(棺臺)로 이어진다. 널방은 길이 4.20m, 너비 2.72m, 바닥에서 천장까지 높이가 3,10m이다. 내부는 모두 연꽃무늬 계열의 벽돌로 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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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

 

 

무령왕릉의 발굴은 백제사 전반, 나아가 한국 고대사 연구에 큰 획을 그은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백제는 기원전 18년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한 후 660년 멸망하기까지 678년 동안 존속하였고, 도읍 위치에 따라 한성 웅진 사비시기로 나눈다. 백제 웅진시기는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었으나 1971년 무령왕릉이 발견됨으로써 백제사 연구의 대전환이 이루어졌다.

 

 

삼국시대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무덤의 주인공이 밝혀진 이 무령왕릉에서는 무덤의 주인공을 알려주는 묘지석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 대표적인 유물 중에는 왕과 왕비의 금제 관 꾸미개 4점을 비롯하여 다양한 장신구, 금동신발, 청동거울, 중국제 도자기 등 5천 여점에 이르며, 이 중 12종목 17점이 국보로 지정될 정도로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유물이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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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꾸미개(왕)_국보 제 1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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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꾸미개(왕비)_국보 제 155호

 

 

무령왕릉(武寧王陵)의 지석(誌石)에는 무령왕을 “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이라고 나타내고 있으며, 그가 62세 때인 계묘년(癸卯年) 오월병술삭칠일(五月丙戌朔七日)에 죽었고, 2년 뒤인 을사년(乙巳年, 525년) 팔월계유삭십이일(八月癸酉朔十二日)에 대묘에 안장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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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석(왕)_국보 제 16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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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석(왕비)_국보 제 162호

 

 

즉 무령왕과 왕비는 사망 이후 27개월, 즉 3년간의 빈장을 치른 뒤에 대묘大墓에 모셔졌다. 삼년상은 중국의 유교적 전통에 기반을 둔 것으로, 당시 백제에 유교적 의례가 도입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중국과 달리 빈장이나 가매장假埋葬 상태로 3년 상을 치른 뒤 시신을 안치하는 등 백제의 고유한 상장례 전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무령왕릉은 분명 우리 고고학 사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발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위대한 발견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12시간이라는 짧은 시간에 급하게 서둘러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3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졸속 발굴이라는 지탄을 받고 있다. 당시 발굴단장 이었던 고 김원룡 전 국립중앙박물관 단장은 이러한 무령왕릉의 발굴은 자신의 실수이자 평생의 아쉬움의 하나라고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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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 진묘수 (기획전시실의 복제품)

 

 

 

국립공주박물관 무령왕릉 발굴 50주년 기념 특별전

올해는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여 국립공주박물관(관장 한수)이 무령왕릉 출토유물 전부를 비롯하여 발굴조사 과정의 기록물을 포함하여 5,232점을 한자리에 모은 ‘무령왕릉 발굴 50년, 새로운 반세기를 준비하며’ 특별전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이번 특별전은 1971년 발견 이후 처음으로 무령왕릉 출토유물 모두를 한자리에서 공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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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의 묘지석에는 무령왕은 462년에 출생하였고 계묘년癸卯年(523년) 5월 7일에 돌아가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도 무령왕이 501년 즉위하여 523년 5월에 돌아가신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무령왕이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나오지만,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개로왕의 아들로, 주로 달린 『백제신찬百濟新撰」에는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의 아들로서 동성왕의 어머니가 다른 형(異母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학계에서는 무령왕을 곤지의 아들로 보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여전히 개로왕의 아들이라고 보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일본서기』에는 무령왕이 쓰쿠시 가쿠라시마(各羅島)에서 태어난 것으로 전하는데, 이곳은 현재 규슈(九州]의 작은 섬인 가카라시마(加唐島)로 여겨진다. 무령왕의 이름은 지석에는 ‘斯麻(사마)’로, 『삼국사기』에는 ‘斯摩(사마)’와 ‘餘隆(여융)’ 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신장이 8척이고, 눈매가 그림과 같았으며 인자하고 너그러워서 민심이 그를 따랐다”고 한다. 그는 501년(동성왕 23)에 동성왕이 사냥에 나갔다가 좌평(佐平) 백가(苩加)가 보낸 자객에게 칼에 찔려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武寧(무령)’은 돌아가신 뒤에 올린 시호(諡號)이다.

 

 

무령왕릉 출토유물 5,232점 전체를 최초로 한자리에

전시는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 두 곳에서 전시되고 있다. 상설전시실에서는 무령왕릉 출토유물 중 왕과 왕비가 착용한 대표적인 국보들을 중심으로 전시하였으며, 기획전시실에서는 복원, 복제된 유물을 비롯하여 1971년 무령왕릉 발굴조사와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 앞으로의 연구 과제를 중심으로 전시를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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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침 있는 은잔

 

 

 

상설전시실 도입부에는 백제인들의 내세관과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받침 있는 은잔을 전시하고 그 안에 새겨진 아름다운 문양들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되었고 이어 왕과 왕비의 관꾸미개, 금귀걸이, 청동거울, 진묘수 등 주요 유물은 새롭게 진열장 유리를 저반사유리로 교체하고 조명과 받침대를 개선하여 감상 효과를 높였다. 왕과 왕비의 목관은 3D 스캔하여 실제 크기로 새롭게 전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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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왕비 목관재 표면과 바닥에서 철제 못 1,279점과 금동제 못 19점이 확인되었다. 이 가운데 왕과 왕비 목관에 사용한 널못은 123점이며, 다른 못들의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다. 목관재를 결구할 때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꺾쇠는 197점 확인되었다. 왕 널못은 7~9엽 꽃잎의 철제 못 머리에 금판을 씌우고 동제 받침에 은판을 씌워 결합한 것으로, 전체 65점 중 10점이 현재 목관에 박혀 있다. 왕비 널못은 8~9엽 꽃잎의 철제 못 머리에 은판을 씌운 것으로 전체 58점 중 3점이 목관에 박혀 있다. 일부 못 머리에 직물 흔적이 남아 있어 널방 내부나 목관을 직물로 장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목관 외에도 여러 목재편이 확인되었다. 진묘수 뒤쪽 널길 중간과 널방 입구 사이에서는 나무문과 제대, 금동 테 두른 목기가 확인되었고, 출토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주칠기 조각이 내부 잔류물 수습 과정에서 확인되었다. 성분 분석 결과 나무문은 삼나무, 제대는 목관과 같은 금송으로 만들었음이 확인되었다.

 

 

특히. 무령왕과 왕비의 베개, 발받침은 나무로 만들어 장기간 전시를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동안 상설전시실에서는 복제품을 전시해 왔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왕의 것과 왕비의 것을 교대로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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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베개와 발받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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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의 베개와 발받침

 

 

무령왕과 왕비의 베개, 발받침은 형태와 크기가 비슷하지만 표면채색, 장식 방법 등에는 차이가 있다. 베개는 모두 나무 위쪽을 중앙에서반원으로 파내어 머리를 고정할 수 있게 만들었으며, 발받침은 나무 위쪽을 중앙에서 W자 모양으로 깎아내어 시신의 두 발을 안치하도록 만들었다. 왕 베개와 발받침은 나무 표면에 전체적으로 옻칠을 한 뒤 장방형 금판을 이어서 육각형 문양을 만들고, 그 모서리와 중앙에 달개가 달린 금제 꽃모양 장식을 붙였다. 왕비 베개와 발받침은 나무 표면에 천연광물인 진사辰砂를 붉게 칠하고 그 위에 검은 먹과 흰색 안료로 무늬를 그려 넣었다. 베개는 폭이 좁은 금박으로 테두리를 돌리고 안쪽에 금박으로 육각형 문양을 만들었으며, 발받침은 테두리에만 금박을 붙여 장식했다. 수종樹種 분석 결과 왕 베개는 주목朱木이고 왕비 발받침은 향나무속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주목과 향나무속은 한반도에 자생하는 나무로, 목관을 일본산금송으로 만든 것과 비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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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신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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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신발(왕비)

 

 

왕 금동신발은 모양 확인이 불가능한 상태로, 왕비 금동신발은 뒤꿈치가 부서져 없어진 채 발견되었다. 금동신발은 좌측판과 우측판, 바닥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양이 없는 은판(왕)과 금동판(왕비)에 문양을 맞새김한 금동판을 덧대어 결합하고 동제 실[銅絲]과 못(리벳)으로 고정하였다. 문양은 육각무늬 안에 새(봉황문鳳凰文)와 꽃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좌·우측판은 원형의 달개를 동제 실로 고정하고, 바닥판은 원형의 달개를 꿴 동제 실과스파이크로 고정하여 실용성과 장식성을 모두 추구하였다. 성분 분석 결과 각 판의 바깥 부분과 일부 장식품은 수은 아말감법으로 도금하였지만 각판의 안쪽과 못의 몸통은 도금하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왕 금동신발 안쪽 면에 덧댄 은판은 순은(99%)으로 확인되었다.

 

 

기획전시실에서는 무령왕릉 발굴 이후 50년 동안 공주박물관이 무령왕릉 유물을 관리, 보존하며 정리한 성과들과 과학기술의 발달로 새롭게 밝혀낸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무령왕과 왕비 목관의 크기와 구조, 장식 부착 여부 등 정밀 조사 결과를 반영한 목관 재현품과 무령왕에 대하여 기록된 묘지석과 삼국유사, 백제의 대외교류를 보여주는 중국 청자와 오수전, 동제 그릇, 무령왕과 왕비 금동신발 내부에서 발견된 직물 등을 조사하여 백제의 뛰어난 제직(製織)기술을 보여주는 금(錦) 직물과 라(羅) 직물 재현품을 제작하여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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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전시실

 

 

또한, 무령왕릉 발견 최초 보고 문서와 발굴조사 실측도면, 탁본을 비롯하여, 당시 언론 보도 내용과 분위기도 소개하고 있다. 전시실 입구에서는 무령왕릉 발견 이후 국립공주박물관이 발간한 다양한 서적을 관람객이 직접 살펴볼 수 있다.

 

더불어 박물관 실감 영상실에서는 무령왕이 돌아가신 523년부터 무령왕릉이 발굴된 1971년까지 무덤 안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영상으로 만날 수 있는 ‘무령왕릉 1,448년간의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다. 전시는 2022년 3월 6일(일)까지 진행되며, 현재는 사전예약을 통해서만 관람할 수 있다. [허중학 기자]

 






[허중학 기자 ost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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