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당신의 기억 속에 여의도는 어떻게 남아있나요?

서울역사박물관, 여의도 100년사 한눈에 展
기사입력 2021.08.03 14:11 조회수 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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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우수상_여의도의 가을.JPG
여의도의 가을 [사진제공=서울시]

 

 



[서울문화인] 중년의 두 여성분이 과거 여의도를 회상하며 말씀을 나누신다. 그 분들과 비슷한 추억을 기억하고 있어 “혹시 서울분이세요?”라고 여쭤보니 “아뇨 저희는 부산사람입니다.” 그러나 나 또한 서울사람이 아니지만 여의도를 기억하는 것은 비슷했다.

 

여의도는 정치, 금융, 방송의 중심지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여의도는 서울의 어느 곳 보다 대한민국 근대사와 함께 해온 곳이다. 여의도 하면 떠오르는 기억은 무엇보다 여의도 광장의 기억이다. 남북한의 국사력 경쟁 속에 우리의 국방력을 알리기 위한 80년대 국군의 날 행사, 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국풍81과 같은 관제행사, 전후 세대는 물론 전 세계인들에게 6.25전쟁의 상처를 깊게 각인시킨 KBS 이산가족찾기 방송(1983년), 교황 바오로 2세의 방한 행사(1984년), 첫 대통령직선제로 자신들의 세를 알리는데 활용했던 제13대 대통령선거 유세(1987년)을 비롯하여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이후 관제 집회가 열리던 여의도광장은 대통령 유세와 시민 주도의 시위가 줄을 이었다. 이처럼 여의도는 때로는 정치적 목적으로 때로는 시민들이 목소리를 내는 광장의 기억으로 가득하다.

 

이는 7~8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거의 비슷한 기억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마도 당시 텔레비전이 보급되면서 전 국민 누구나 방송을 통해서 함께 공유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1995년 서울 민선시장이 부임하며 국가권력의 상징이었던 여의도광장은 1999년 ‘여의도공원’으로 바뀌게 되면서 더 이상 정부나 시민들의 목소리를 내는 광장의 이미지는 사라지게 되었고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더 이상 정치적 목소리 보다는 여의도 광장에서 수많은 연인들이 함께 자전거를 타던 추억마저 가물가물해져갔다.

 

 

여의도공원(1994, 2014년) 01.jpg
여의도공원(1994, 2014년)

 

 

1980년대 들어서며 새로운 정권의 정당성을 위해 5·16광장의 이름을 ‘여의도광장’으로 바꾸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가 확정되며 시작된 한강개발계획에 따라 한강시민공원이 재정비되고 유람선이 다니기 시작하였다. 여의도 동쪽 끝에 당시 동양 최고의 63빌딩이 완성되어 발전된 서울의 모습을 올림픽을 통해 전 세계에 선보였다.

 

 

서울역사박물관(관장 배현숙)에서 열리고 있는 서울반세기종합전 <모래섬, 비행장, 빌딩숲 여의도>展 바로 오랜 기억 속에 여의도를 다시 한 번 기억하는 전시이다. 전시는 후리의 그 기억을 넘어 조선시대 목양장에서부터 비행장, 정치, 금융의 중심지에 이르기까지 시민과 함께해 온 여의도의 변천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시이다.

 

 

여의도의 변화모습 전시장.jpg

 

 

여의도는 모래톱으로 이루어져 이용가치가 적은 땅이었다.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 초까지 비행장으로 사용되다가 1968년 윤중제 착공과 함께 강력한 국가 주도의 개발로 신개념의 도시가 계획되고 실현되었다. 서울에서 가장 평평하고 완결된 섬 여의도는 어떻게 정치, 방송,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을까...

 

전시는 18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여의도 관련 자료를 통해 조선시대 여의도의 모습, 일제강점기 항공교통의 중심지였던 비행장, 해방 이후 1960년대 윤중제 축조를 시작으로 빌딩숲에 이르기까지 변천과정을 조명하고 있다. 보통 이런 전시는 당시의 기록물을 통해 과거를 기억하는데 이번 전시에서 두 개의 영상은 이 전시가 아니 우리가 기억하는 여의도를 짧은 시간에 알려준다. 바로 전시장을 들어서면 전시장 바닥에는 그려낸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변화과정을 여의도 영상과 전시장을 나설 때 그려낸 여의도 광장의 변천사를 그려낸 영상이 아닌가 싶다. 그래도 전시장 깊이 더 들어가 보자.

 

 

여의도의 변화과정 영상.jpg
여의도의 변화과정을 영상을 통해 압축하여 보여주고 있다.

 

 

 

1부 조선시대의 여의도

1부에서는 조선시대 여의도에 대한 모습을 기록한 자료를 통해 당시 여의도의 모습을 보여준다. 조선시대 여의도는 ‘잉화도仍火島’ 또는 ‘나의주羅衣洲’라고 불렸으며 인접한 율도栗島(현 밤섬)과 크게 구분 짓지 않았다. 『세종실록』 등에서는 여의도를 가축을 기르는 섬이다. 현재 강남구 압구정동에 있었던 것으로 잘 알려진 ‘압구정狎鷗亭’은 처음에는 여의도에 있었다. 조선전기 문신 김수온(金守溫, 1410~1481)의 「압구정기狎鷗亭記」과 서거정(徐居正, 1420~1488)「압구정부狎鷗亭賦」에서는 당시 여의도에 있던 압구정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겼다. 또한 강희맹(姜希孟, 1424~1483) 『사숙재집私淑齋集』,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등에서 여의도의 모습을 시로 남기기도 했다.

 

 

884년 마포에서 바라본 여의도 모습 01.jpg
퍼시벌 로웰(Percival Lawrence Lowell, 1855~1916)이 촬영한 1884년 여의도의 모습 / 이 사진은 마포구 마포동 벽산빌라(지하철 5호선 마포역 부근) 자리에 있던 담담정淡淡亭(조선 초 안평대군이 지은 정자)에서 여의도를 바라보고 촬영한 것으로 사진 가운데 보이는 산은 양말산羊馬山으로 현재 국회의사당 자리이다. 1884년 여의도를 촬영한 사진은 현재까지 여의도를 촬영한 가장 오래된 사진으로 볼 수 있다.

 

 

 

2부 비행장이 된 여의도

2부에서는 여의도에 비행장이 만들어지게 된 과정, 여의도 비행장의 항공노선, 안창남과 손기정 이야기, 해방 이후의 이범석과 여의도 비행장 그리고 여의도 국제공항에 관한 내용이다.

   

1916년 일제는 여의도를 군용지로 매수하여 연병장으로 사용하였다. 그 중 일부를 활주로와 격납고를 세워 간이비행장으로 만들었는데 이후 1929년에 경성비행장이 되고 군용과 민간이 함께 사용하는 시설이 되었다. 여의도 비행장은 만주와 일본 가운데 위치하여 항공교통의 요지였다. 처음에는 우편비행으로 시작했다가 이후 여객항공으로 발전하였다. 1930년대에는 도쿄-경성-다렌을 잇는 항공노선이 개설되기도 했다. 이러한 항공노선발전은 일제의 만주침략, 만주국 운영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1945년 8월 미군이 촬영한 여의도와 경성비행장 전경 01.jpg
1945년 8월 미군이 촬영한 여의도와 경성비행장 전경

 

 

여의도 비행장에는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여의도 비행장을 무대로 1922년 고국방문비행을 한 안창남(安昌男 1900~1930),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孫基禎 1912~2002) 은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조선 사람들의 자랑이었다. 광복 직후 1945년 8월 18일 한국광복군 이범석과 장준하, 노능서, 김준엽은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한 이야기 등 여의도 비행장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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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10월 17일 여의도비행장에 내린 손기정_출처_매일신보

 

 

1945년 8월 18일 여의도 비행장에 내렸다가 연료보급을 위해 중국 산둥성에 내려 촬영한 사진 01.jpg
1945년 8월 18일 여의도 비행장에 내렸다가 연료보급을 위해 중국 산둥성에 내려 촬영한 사진

 

 

국내에도 미리 광복군이 진입해 있었더라면

여의도에서 맥없이 우리가 발길을

돌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기막힌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김준엽, 『장정』중에서

 

 

미 공군이 주둔 중인 여의도 비행장 사진, 1955년 01.jpg
미 공군이 주둔 중인 여의도 비행장 사진, 1955년 / 1955년까지 여의도에 미 공군이 주둔해있었다. 미 공군병사 잭 윌리엄스Jack William, 앤드류Andrew, 존 애비넷John Avnet 등 3인은 1955년 여의도 미 공군기지에서 근무하는 동안 여의도 주변풍경과 항공사진, 미 공군기지의 모습을 촬영하였다. 여의도의 모습이 생생히 담겨있을 뿐만 아니라 여의도를 연구하는데 있어 역사적 가치도 높다고 할 수 있다.

 

 

 

3부 여의도 개발시대

3부에서는 1968년 여의도의 윤중제 공사에서부터 택지가 조성되어 각종 시설이 입주하여 빌딩숲을 이루고 한강재정비에 이르기까지 여의도의 현대화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1960년대 서울은 인구과밀화, 주택, 급수난 등으로 도심부를 확장해야 했다. 한강 홍수로 인한 침수피해를 계기로 여의도 개발이 중점과제로 떠올랐다. 서울시장 김현옥(재임 1966.3~1970.4)은 여의도에 제방을 쌓고 택지를 개발하면 이러한 문제를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윤중제를 공사하였다. 

 

여의도 도시계획에 대한 초안은 건축가 김수근이 계획하였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이 광장 조성을 지시하여 당초 계획에서 변화가 생겼다. 이와 더불어 와우아파트 붕괴 사건(1970년 4월 8일)으로 김현옥 시장이 사임하고 양택식 시장이 부임하였다. 그는 여의도에 대규모 광장을 조성하고 택지 개발을 시작했다. 드넓은 여의도에는 공공기관 및 기업들이 입주하기 시작했고 여의도는 빌딩숲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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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한강종합개발사업 기공식 당시 여의도 고수부지 모습

 

 

1981년 제24회 올림픽을 유치가 확정되면서 한강의 수질오염과 치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강종합개발계획을 수립하였다. 여의도를 중심으로 하수 처리장, 저수로 정비사업 등이 시행되었고 둔치가 조성되었으며 한강공원이 개장되었다. 2008년에는 여의도를 특화 사업지구로 지정하여 여의도 샛강 생태공원이 조성되었다.

 

 

4부 여의도의 건물들

오래전부터 여의도가 가지는 이미지는 역시 정치, 금융, 방송의 중심지라는 이미지다. 여의도가 이러한 수식어가 생기게 된 데에는 여의도에 대표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4부에서는 국회의사당, 한국거래소, KBS, MBC, SBS, 63빌딩의 건립과정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1971년에 완공된 시범아파트는 국내 최초로 중앙공급식 난방으로 도시가스, 엘리베이터라는 최신식 시설을 갖추었다. 처음에는 접근성이 좋지 못하고 상가도 없어 인기가 없었으나 초·중·고등학교 설립으로 특수학군이 설정되자 엄청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이후 민간업자들이 적극 참여하여 삼익, 은하, 한양아파트 등이 들어섰다.

    

1976년 KBS가 여의도에 신사옥을 건설한 이후 1980년 TBS, 1983년 MBC가 여의도로 이전하였다. 19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 개최로 인해 여의도에는 국제방송센터가 건립되었다. 올림픽 주관방송사인 KBS는 국제신호를 제작해 세계 방송기관에 공급하는 역할과 함께 국제방송센터를 설치·운영 하였다. 1990년 SBS도 여의도에서 개국하며 여의도는 한국 방송산업을 대표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하지만 2014년 상암 디지털미디어시티로 SBS와 MBC가 이전하며 현재 여의도에는 KBS만이 남아 한국방송의 상징으로 자리하고 있다.

 

 

방송국과 국회의사당.jpg
방송국과 국회의사당

 

 

우리나라 금융의 중심은 명동에서 여의도로 이동했다. 1978년 증권감독원(현 금융감독원)이 여의도 화재보험빌딩으로 이전했고, 1920년대 이래 명동에 위치했던 한국증권거래소(현 한국거래소)도 1979년 여의도로 자리를 옮기며 여의도 금융시대가 열렸다. 1980년대 중반 경제 호황으로 성장한 증권사들은 거래 업무 전산화가 진행되면서 빠른 전산거래를 위해 여의도 거래소 내 전산시스템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위치하기 위해 여의도로 이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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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한국 증권거래소 신축개관 당시 모습

 

 

5부 시민의 광장으로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은 5.16 광장을 만들 것을 지시하고 1971년 제23회 국군의 날 행사 개최되었다. 이후 반공행사, 교련대회, 국풍81 등 관제행사가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1973년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1983년 KBS 이산가족찾기 방송, 1984년 교황 바오로 2세의 방한 등의 행사로 점점 시민들이 참여하기 시작했다. 6월 민주항쟁 이후 1987년 제13대 대통령선거 유세, 각종 시민대회 개최 등을 통해 시민들이 목소리를 내는 광장으로 바뀌어 갔다. 여의도 광장은 1997년에 조순 시장의 공원 추진화를 통해 1999년 여의도 공원으로 바뀌었고 시민들을 위한 휴식공간이 되었다.

 

 

(사진9)1972년 5월 1일 여의도광장에서 개최된 방첩 및 승공 국민총궐기대회.jpg
1972년 5월 1일 여의도광장에서 개최된 방첩 및 승공 국민총궐기대회

 

 

(사진19)1984년 여의도광장 국군의 날 행사 모습.jpg
1984년 여의도광장 국군의 날 행사 모습

 

 

여의도 광장에서의 제13대 김대중 후보 대통령 선거 유세, 1987년, 국가기록원 제공.jpg
여의도 광장에서의 제13대 김대중 후보 대통령 선거 유세, 1987년, 국가기록원 제공

 

 

(사진24)이산가족 벽보가 붙은 KBS 앞.jpg
이산가족 벽보가 붙은 KBS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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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네스북에 올라간 세계 최장 생방송 기간은 ‘138일 453시간 45분’으로, 1983년 KBS의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이 기록돼 있다. 1983년 6월 30일 밤 120분 분량의 프로그램이 나간 이후 KBS는 이산가족을 찾는 벽보로 뒤덮이게 됐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총 1만 189명의 이산가족이 상봉하였는데, 6·25전쟁(38.8%)과 1·4후퇴(26.9%)때 헤어진 형제자매(50.1%)를 찾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 프로그램 관련 2만 522건의 기록물은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전시의 시작이 여의도의 변화상을 영상으로 만나볼 수 있었다면 전시의 마지막은 여의도 광장의 변화상을 영상으로 보여주며 전시를 마치고 있다.

 

 

여의도 광장의 변화과정 영상 01.jpg
여의도 광장의 변화과정을 그려낸 영상

 

 

21세기 20대들은 여의도하면 무엇을 떠올릴까? 정치, 여의도 한강공원, 윤중로의 벚꽃, 불꽃놀이, ... 그 기억은 현대에는 개개인이 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분명 20세기 근대화시기 여의도를 추억하는 사람들은 비슷한 추억을 공유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느껴볼 수 있는 전시가 아닌가 싶다.

 

100년간의 여의도 역사, 그 속에 우리의 기억을 살펴볼 수 있는 이번 전시는 9월 26일까지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진행된다. [허중학 기자]

 

 

 

 

[허중학 기자 ost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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