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인] 국가정사를 총괄하던 조선시대 최고 행정기구이자, 지금의 광화문광장~세종대로인 옛 육조거리에 있던 주요 관청 중 유일하게 흔적이 남아있는 ‘의정부’의 터(의정부지, 議政府址)가 문화재청 심의 끝에 국가지정 문화재(사적)가 된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훼손돼 지금은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됐던 의정부 터(유구)의 가치가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의정부는 1400년(정종 2년) 처음 설치된 이후 1907년 내각 신설로 폐지될 때까지 영의정‧좌의정‧우의정 등이 국왕을 보좌하며 국가정사를 총괄하던 조선시대 최고 행정기구였다. 임진왜란 이후 비변사에 그 실권이 넘어가고 임진왜란 당시 화재로 건물도 훼손돼 그 위상이 떨어졌으나, 흥선대원군 집권 후 왕실권위회복을 위해 1865년 경복궁 중건과 함께 재건됐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산업화‧도시화 과정에서 육조대로 주요 관청터에 대형 고층건물들이 자리하면서 역사적 경관이 대부분 훼손됐다. 의정부 터에는 1990년대까지 여러 행정관청이 자리했으며, 1997년부터 서울시가 ‘광화문 시민열린마당’(공원)으로 사용해왔다.
2013년 서울시가 의정부 터에 대한 부분 발굴조사를 통해 옛 ‘의정부’의 유구와 유물을 처음으로 확인한 이후 2016년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시작했다. 4년간의 조사로 발굴조사 결과, 그동안 사료를 통해 추정만 했던 의정부 주요건물 3채의 위치와 규모를 실제 유구를 통해 확인했다. 의정부와 육조거리를 사이에 두고 있었던 삼군부 역시 중심건물 세 전각이 나란히 있고 그 외곽을 행랑이나 조방이 감싸고 있는 형태였다.
삼군부 등 조선시대 육조대로 관청들이 있던 자리가 지금은 대부분 고층건물이나 도로로 바뀌어 더 이상 흔적을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조선시대 관청의 건물 배치와 규모를 실제로 확인한 귀중한 사례이다. 삼군부의 경우 세 건물 중 총무당(중심건물)과 청헌당(총무당 좌측 건물)이 각각 낙산공원과 육군사관학교로 옮겨져 보존되고 있지만, 의정부 내 건물은 모두 멸실돼 사진으로만 짐작할 수 있었지만 1865년 고종이 직접 쓴 ‘정본당’ 현판(국립고궁박물관 소장)은 가로 2미터, 세로 1미터에 달하여 의정부 건물의 규모와 위용이 궁궐 전각에 뒤지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의 근무처였던 ‘정본당’을 중심으로 양 옆으로 ‘협선당’(종1품‧정2품 근무처)과 ‘석획당’(재상들의 거처)이 나란히 배치된 모양새와 ‘정본당’ 뒤 후원에 연지(연못)와 정자가 나란히 있었던 흔적도 발굴했다. 주요 건물이 나란히 있고 그 뒤로 연못과 정자가 있는 후원이 배치된 건축양상은 의정부를 비롯해 조선시대 주요 관청 건축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이밖에도 의정부터에서는 기와 조각, 도자기(청자‧분청사기‧청화백자) 조각 등 조선시대 유물 760점과 함께 1910년 일제가 의정부 자리에 건립한 옛 ‘경기도청사’ 건물 터(1967년 철거)의 벽돌 기초도 발굴됐다.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를 지나 근현대에 이르는 다양한 역사의 층위가 확인된 것이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이 건물은 이후 1960년대까지 정부청사 별관 등으로 쓰였다.
한편, 문화재청은 지난 8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문화재위원회(사적분과)를 열고 ‘의정부지’를 국가 사적으로 지정하는 안을 의결했다. 20일(월)부터 30일 간 문화재 지정 예고를 통해 의견을 수렴한 후 문화재위원회 2차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 문화재(사적)로 최종 지정된다.
서울시는 이번에 발굴한 의정부 터 유구를 현 위치에 온전히 보존‧보호하고, 최소한의 관람 유도시설을 설치해 향후 시민들에게 개방한다는 계획이다. [김진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