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문화재적 가치가 논란이 있었던 명승 제35호 ‘성락원’ 결국 지정 해제

역사적․경관적 가치 등 인정해 ‘서울 성북동 별서’이름으로 재지정 예고
기사입력 2020.06.24 11:49 조회수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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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락원_영벽지 괴석과 별채.jpg
성락원_영벽지 괴석과 별채

 

 

[서울문화인] 지난해 성락원의 문화재적 가치가 논란이 있었다. 이후 문화재청은 지정 과정상의 일부 문제점을 인정하고, 역사성 등 문화재적 가치에 대해 원점에서 재검토를 진행해 왔다.

 

지난해 6~7월 한 달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관련 문헌자료들을 전면 발굴하여 조사하였고, 그 결과에 대해 관계전문가 자문회의(3/2019.6.27., 7.10., 10.2.), 공개토론회(2019.8.23.), 법률자문(2/정부법무공단) 등을 통해 다각적으로 확인하였다.

 

조사 결과, 당초 지정사유였던 조성자로 알려진 조선 철종 대 이조판서 심상응은 존재하지 않은 인물로 확인되었으며, 황윤명의 춘파유고(春坡遺稿), 오횡묵의 총쇄록(叢瑣錄)등의 문헌기록에 따를 때, 조선 고종 당시 내관이자 문인인 황윤명(黃允明, 1844-1916)이 조성자임이 새로이 밝혀졌다. 또한, 갑신정변(1884) 당시 명성황후가 황윤명의 별서를 피난처로 사용했다는 기록(일편단충(一片丹忠)의 김규복 발문, 조선왕조실록 등)에 따라, 이 별서가 1884년 이전에 조성된 것도 확인되었다.

 

* 춘파유고(春坡遺稿): 황윤명의 차손 안호영이 황윤명의 시문을 모아 발간한 유고문집. 이에 수록된 인수위소지(引水爲小池) 시문이 성락원내 영벽지 각자와 일치

* 총쇄록(叢瑣錄): 오횡묵이 자신이 관리로 있던 곳의 현황 등을 일기시문의 형식으로 기록한 것으로, 황윤명이 조성한 별서정원을 1887년 방문하였다고 기록

* 일편단충(一片丹忠)의 김규복 발문 : 명성황후가 갑신정변 이후 김규복황윤명 등에게 직접 써서 나눠준 것으로, 김규복이 여기에 발문을 붙임. 갑신정변 당시, ‘혜화문으로 나가 성북동 황윤명 집으로 향했다’, ‘태후, 왕비, 세자께서 이미 어가에 머무르고 있었다고 기록

 

이러한 역사성에 대한 검토와 더불어, 관계전문가 7명의 현지조사(2020.5.4)를 통해 경관성학술성 등 명승으로서의 가치도 재조사하였다. 그 결과, 성락원은 자연 계류와 지형, 그리고 암석 등이 잘 어우러져 공간 구성경관 연출 등의 측면에서 한국전통 정원으로서의 미학이 살아있는 곳으로,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다는 의견들이 제시되었다.

 

다만, 명승 지정 이후 진행된 성락원 복원화사업(2008~2009)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부 원형복원이 미흡한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지속적인 보완이 필요하다는 견해와 성락원이라는 명칭을 춘파유고에 기술된 기록(雙流洞), 입구 바위에 새겨진 각자(쌍류동천, 雙流洞川) 등을 고려하여 변경해야 한다는 의견도 함께 제시되었다.

 

문화재청이 24일 문화재위원회(천연기념물분과)를 개최해 명승 제35성락원을 지정 해제하고, ‘서울 성북동 별서로 재지정하는 방안을 검토한 결과 명승 제35성락원은 지정명칭과 지정사유 등에서 오류가 일부 인정되는 바, 사회적 논란을 불식하고 새로이 밝혀진 문화재적 가치를 명확히 하기 위하여 명승에 대한 지정 해제를 결정했다.

 

하지만, 이 공간은 조선 고종대 내관 황윤명이 별서로 조성하기 이전에도 경승지(경치가 좋은 곳)로 널리 이용되었고 갑신정변 당시 명성황후의 피난처로 사용되는 등의 역사적 가치와 다양한 전통정원요소들이 주변 환경과 잘 조화되어 있어 경관적 가치 또한 뛰어난 것으로 판단과 함께 현재 얼마 남지 않은 조선 시대 민가정원으로서의 학술적 가치 등도 인정되어 명승(서울 성북동 별서)로 재지정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문화재청은 성락원의 지정해제 및 서울 성북동 별서의 지정에 관한 사항은 30일간 관보에 예고하여 사회 각계의 의견을 수렴한 후, 그 결과를 최종적으로 심의된다.


 

1974년 국보된 백자 동화매국문 병은 희소성 부족한 원나라 작품으로 지정 해제

 

백자 동화매국문 병 01.jpg
백자 동화매국문 병

 

 

그동안 국보로서 위상과 가치 재검토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어 온 국보 제168백자 동화매국문 병(白磁 銅畵梅菊文 甁)’은 국보 지정이 해제되었다. ‘백자 동화매국문 병출토지나 유래가 우리나라와 연관성이 불분명하고 같은 종류의 도자기가 중국에 상당수 남아 있어 희소성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작품의 수준 역시 우리나라 도자사에 영향을 끼쳤을 만큼 뛰어나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해 30일간의 예고 기간을 거쳐 해제가 최종 결정되었다. 이에 해당 지정번호는 결번 처리되었다. [허중학 기자]

 

 

 

 

 

 

[허중학 기자 ost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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