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조선 시대, 어떤 전염병이 선조들을 괴롭혔고, 조상들은 어떻게 맞섰을까

기사입력 2020.05.11 17:38 조회수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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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준시의 무과 합격자 18인의 초상화, 등준시무과도상첩, 관리들의 초상에서 마마자국이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jpg

 

 

주상(광해군)께서 매우 근심하며 이르기를, "일기가 고르지 않고 역기가 전염하여 재앙이 된 것은 실로 자신에게 허물이 있음이니 내가 어찌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 하고 근신近臣을 보내 향촉香燭을 가지고 제사를 지내죽은 자의 명복을 빌도록 했다. 신하들은 분주히 지방에 내려가고 약재와 의원은 길에서 지나쳐 갔다. 백성들이 건강하고 천수를 누릴 수 있게 하는 정치가 이 책(신찬벽온방)을 한 번 간행하는 사이에 놓여있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은가? - 이정구, 광해군의 명으로 허준이 편찬한 의서로 온역溫疫(티푸스성 질환)에 대비하는 지침서 신찬벽온방新聯福利서문

 

 

[서울문화인]코로나19의 팬데믹으로 전 세계는 생명의 위협은 물론 일상생활을 어렵게 하고 있다. 현대의학으로도 전염병 막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중세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은 수 세기 동안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으며 엄청난 인명피해를 가져왔으며, 조선왕조실록에도 전염병에 대한 기록이 무려 1455건이 넘는다. 현대에도 전염병 막기는 쉬운 일이 아닌데, 의학 기술이 부족했던 과거에 역병은 더 큰 공포의 대상이었다. 한 번 역병이 유행하면 수많은 백성과 가축들이 무참히 목숨을 잃었다. 그러다보니 역병은 기근과 함께 왕이 백성을 위한 가장 중요한 임무가 아닐까 싶다.

 

코로나19로 휴관에 들어갔던 국립중앙박물관이 상설전시실 1층 중근세관 조선2실 한 켠에 <조선, 역병에 맞서다> 테마전으로 재개관을 알렸다. 이 전시는 코로나19 시대에 조선 시대 사람들은 전염병의 공포에 어떻게 대응해 나갔는지를 조명하여 코로나19로 혼란을 겪고 지금, 작은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3부로 구성된 전시는 조선시대 유행했던 대표적인 전염병을 소개하고 역병에 희생된 사람들과 역병의 상처를 딛고 일어선 사람들(1조선을 습격한 역병’), 새로운 감염병의 출현에 대응한 조정의 노력(2역병 극복에 도전하다’), 전염병의 공포를 신앙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백성들의 마음(3신앙으로 치유를 빌다’)을 살펴본다.

 

전시장을 들어서면 흔히 볼 수 있는 조선 시대 관리들의 초상화가 눈에 들어온다. 1774(영조 50) 현직 관리를 대상으로 실시한 특별시험 '등준시登俊試'의 무과 합격자 18인을 기념하여 제작한 18명의 초상화첩 등준시무과도상첩이다. 이 화첩의 18명 중에는 김상옥, 전광훈, 유진하 등 세 사람의 초상화에 두창(마마媽媽, 손님, 천연두)의 흉터가 확인되고 있을 정도로 조선시대에 만연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두창은 전염성과 사망률(대두창의 경우 30%)이 매우 높아 한때 전 세계 인구 사망원인의 10%를 차지하기도 했다. 두창을 앓고 회복된 사람에게는 곪은 부분에 생긴 딱지가 떨어지면서 피부 표면이 움푹 파이는 흉터가 생기는데 이것이 바로 얽은 자국(곰보)이다. 정약용도 어릴 때 두창을 앓은 흔적이 한 쪽 눈썹에 남아 눈썹이 반으로 나뉜 듯 보여 삼미자(三子)라는 별칭이 있었다. 이 초상화를 통해 두창의 위력을 짐작케 하는 동시에 역병을 이겨낸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두창으로 죽은 묘지명.jpg
두창으로 죽은 묘지명

 

 

또한, 두창(痘瘡)으로 죽은 아이들의 묘지명, 조선 중기의 예학자 정경세(鄭經世, 1563~1633)가 춘추관에서 근무하다 두창에 감염되어 죽은 아들을 기리며 쓴 제문祭文이 전염병의 참상과 슬픔을 전하고 있으며, 영조 대 노론의 대표 학자인 이재(李縡, 1680~1747)는 두창에 걸린 두 손자를 치료해 준 의원의 의로움과 뛰어난 의술에 감사하는 시를 통해 조선시대 유행했던 대표적인 전염병에 희생된 사람들과 역병의 상처를 딛고 일어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신찬벽온방, 허준, 1613년(광해군 5), 허준이 편찬한 전염병 전문 의서.jpg
신찬벽온방, 허준, 1613년(광해군 5), 허준이 편찬한 전염병 전문 의서

 

 

 우선 문을 열어두고 큰 솥에 물 2말을 채워 집 한 가운데, 두고 소합향원 20환을 넣고 달인다. 향기가 역기疫氣를 흩어버릴 수 있다. 환자가 한 그릇을 마신 후 의원이 들어가 진찰한다.  환자를 상대하여 앉거나 설 때 반드시 등지도록 한다.  전염되지 않는 방법을 취하지 못한채 온역 환자를 맞이했다면 독기를 빨리 밖으로 뱉어내야 한다.  창졸간에 약이 없는 경우 참기름을 코끝에 바르고 종이심지로 콧구멍을 후벼 재채기를 한다.  웅황가루를 참기름에 개어 콧구멍 속에 바르면 환자와 침상을 함께해도 전염되지 않는다.  집안에 시역이 유행하면 처음 병이 걸린 사람의 옷을 깨끗하게 세탁한 후 밥 시루에 넣어 찐다.

 

 


 

 

허준은 '신찬벽온방에서 불가피하게 온역 환자를 접촉해야하는 이들을 위한 주의사항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2부에서는 17세기 초 온역(溫疫, 티푸스성 감염병), 18세기 홍역 등 새로운 감염병의 출현에 대응한 조정의 노력을 조명한다.

 

1613(광해군 5) 광해군의 명으로 허준이 편찬한 의서 신찬벽온방(보물 1087, 허준박물관)1612~1623년 조선 전역을 휩쓴 온역에 대응하는 지침서의 성격을 가진다. 허준은 이 책에서 전염병의 원인으로 자연의 운기의 변화와 함께 위로받지 못한 영혼(여귀 厲鬼), 청결하지 못한 환경, 청렴하지 않은 정치 등을 꼽았다. 결국 전염병의 종식에는 통치자의 반성과 함께 공동체가 고통을 분담하여 대처하는 인술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더불어 흉년과 전염병으로 버려진 아이들에 대한 긴급 구호 명령인 자휼전칙를 통해 조선시대 전염병의 공포를 약자에 대한 보호와 공동체 의식으로 극복하고자 역사의 지혜를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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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금기 치유를 소망하다

 

 

괴질이 돌 때 역할을 한 <대신마누라도>(가회민화박물관), 전란과 역병 같은 국가적 재앙에서도 구원해 준다고 여긴 석조약사불(국립대구박물관) 등 과학적 접근이 어려웠던 과거에는 의술과 더불어 신앙으로 치유를 바랬다. 특히 서민층에는 그것이 더욱 심했을 것이다. 3신앙으로 치유를 빌다에서는 전염병의 공포를 신앙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백성들의 마음을 살펴보고 있다. 조선시대 내내 위협적이었던 두창은 질병 자체가 고귀한 신으로 받들어져 호구마마, 호구별성 등 무속의 신이 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아마도 강한 두려움이 신앙심으로 바뀌어 전염병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무녀내력, 20세기 전반, 마마신을 쫒는 굿을 그린 그림.jpg
무녀내력, 20세기 전반, 마마신을 쫒는 굿을 그린 그림

 

 

의학의 기술로 현대인은 분명 과거보다는 전염병의 공포를 실감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에서 전염병이 완전히 정복된 적은 없다. 지금보다 더 참혹했을 역병 속에서도 삶을 살아 낸, 그리고 그 공포를 적극적으로 이겨내고자 했던 선조들의 의지를 이번 전시에서 조금이라도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허중학 기자]

 

 

 

 

 

 

[허중학 기자 ostw@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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