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과천 서울 3관 통합 대규모 기획전
- 1부 덕수궁: 일제강점기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키려 한 의로움의 미술사
- 2부 과천: 민주화의 증인으로서 ‘광장’ 재현한 전시장 및 작품/사료
- 3부 서울: ‘동시대 광장’으로 주목받는 미술관과 다원화된 공동체
- 덕수궁과 서울 2020년 2월 9일까지, 과천 2020년 3월 29일까지
- 11월 13일(수) 《광장》 연계 학술세미나 개최
[서울문화인]서울 경복궁 뒤뜰 옛 조선총독부 미술관자리에 간판이 처음 내걸린 국립현대미술관(MMCA)이 올해로 개관 50주년을 맞이하였다.
당시 국립의 간판을 내걸었지만 KBS 중앙방송국장을 지낸 김임용 초대관장을 비롯, 직원은 4명에 불과했고 소장품은 단 한 점도 없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은 과천·서울·덕수궁·청주 등 4개관으로 확장됨은 물론 전무했던 소장품 역시 2019년 9월 현재 8천 점이 넘는다.
무엇보다 50주년을 맞이하며 외연 또한 많이 확장되었다. 먼저 1986년 국제적 규모의 시설과 야외 조각장을 겸비한 과천으로 신축· 이전하여 과천시대를 연 이후, 1998년에는 덕수궁 내에 위치한 덕수궁관이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으로 개관하며 2관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과천관의 접근성으로 인해 접근성 좋은 서울 도심 미술관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문화예술계를 중심으로 제기됐다. 길고 긴 논의 과정을 거쳐 2013년 11월 서울 종로구 소격동 옛 기무사터에 서울관이 들어섰고 지난해 12월에는 개방형 수장고 형태의 국립미술품수장보존센터인 청주관까지 문을 열면서 현대미술관은 4관을 보유한 규모면에서는 아시아 최대 규모로 거듭났다.
하지만 현대적 미술관의 역사는 그 보다 앞선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이 사용하고 있는 건물(덕수궁 석조전 서관)은 1933년 덕수궁이 일반에게 공개된 이후 황실이 조선미술전람회의 일환으로 조선미술품을 진열할 수 있는 박물관을 짓기로 결정하면서 설립되었다. 1936년 8월 21일 덕수궁 석조전 기공식을 가져 1938년 2월에 건평 356평, 지상 3층, 총 1,929평(3,428㎡)으로 화강암과 인조석을 섞어 의석조로 지었다. 설계자는 조선은행 건축 감독자로 일한 바 있는 일본인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村與資平]가 담당하였으며, 당시 총예산 30만원이 들었다. 이후 덕수궁 신관은 이왕가박물관, 구관은 덕수궁미술관(현 석조전)으로 불렸다. 이곳은 광복 후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고, 이후 유엔 국제연합한국위원단이 사용하였다. 1954년 이후 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되다가 1973년 7월 국립현대미술관이 경복궁에서 덕수궁으로 이전함으로써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었다. 1986년 8월 국립현대미술관이 과천으로 신축 이전한 후 국립국어연구원이 입주하여 사용하다가 1998년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을 개관하여 현재까지 사용 중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분명 외연은 확장되었지만 여전히 미술계에서의 다양한 비판이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예술품이 예술적 가치가 넘어 투자의 수단이 되고 여전히 학벌, 파벌이 존재하는 이상, 그것에서 자유롭다면 그 비판은 힘을 얻을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요지는 그것이 아니다. 국립현대미술관 개관 50주년을 맞이하여 지난 10월 17일부터 3개관(과천, 덕수궁, 서울관)에서는 한국미술과 미술관이 나아갈 미래를 국민과 함께 그려본다는 취지 아래 20세기 여명부터 현재까지 격동의 한국사와 미술사를 살펴보는 대규모 기획전 《광장: 미술과 사회 1900-2019》를 개최하고 있다.
‘광장’은 월간 『새벽』 1960년 11월호에 발표된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서 타이틀을 잡았다. 이 작품은 중립국을 선택한 포로를 다루었기 때문에 이승만 정권 치하에선 발표될 수 없었지만 4·19혁명 덕분에 발표가 가능했다. <광장>은 터부시되었던 남·북한의 대립을 정면으로 파헤친 관념적 경향이 짙은 작품이다. 주인공 이명준은 남북한 체제를 동시에 겪어본 인물로 ‘남한의 나태와 방종, 북한의 부자연스러운 이념적 구속’에 환멸을 느껴 ‘중립국’을 선택해 인도행 배에 오르지만 행선지에 도착하기 전에 바다에 몸을 던져 죽는다. 1961년 단행본으로 나온 <광장>의 서문에서 최인훈은 인간은 광장에 나서지 않고는 살지 못하는 동시에 밀실로 물러서지 않고는 살지 못하는 동물이라는 걸 전제하였다.
‘광장’ 전은 한국미술 100년을 대표하는 회화, 조각, 설치 등 450여 점의 작품을 시대별로 구성하여 세 개관에서 선보이고 있다. 덕수궁관에서는 1900년부터 1950년대를, 과천관에서는 1950년대부터 현재를 통사적으로 바라보며, 서울관에서는 동시대 한국 사회의 이슈를 주제로 각각 진행하고 있다.
《광장》1부. 덕수궁관(2019.10.17~2020.2.9.)
덕수궁관은 그동안 190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한국 근대 미술뿐만 아니라 아시아 및 서구 근대미술을 함께 다뤄왔다. 이번 덕수궁관에서 진행하는 《광장》1부에서는 1900~1950년의 시기 미술사에서 19세기말 개화기에서부터 일제강점기와 해방을 거치면서 격동하는 시대의 파고 속에서도 ‘의로움’을 지켰던 역사적 인물과 그들의 유산을 살펴보고 있다.
채용신, 오세창, 안중식, 김용준, 김환기, 이쾌대 등 작가 80여 명 작품 130여 점과 자료 190여 점을 선보이는 이곳 전시는 “의로운 이들의 기록”, “예술과 계몽”, “민중의 소리”, “조선의 마음” 4가지 주제로 시대의 변화에 따라 예술에 관한 다양한 시각과 입장이 공존한 역동적인 한국 근대사를 조망하고 있다.
을사늑약 체결 후 낙향하여 우국지사의 초상화를 주로 그린 채용신의 대표작 <전우 초상>(1920), 의병 출신 화가의 지조와 절개를 보여주는 김진우의 <묵죽도>(1940), 3·1운동 참여 후 수배를 피해 중국을 거쳐 미국에서 유학한 임용련의 <십자가>(1929)을 비롯하여 이중섭만큼 그 성품과 화격을 인정받았던 인물이었으나 월북하면서 잊혀진 작가 최재덕의 <한강의 포플라 나무>(1940년대)와 <원두막>(1946)이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 일반에 공개된다.
현채가 저술하고 안중식이 삽화를 그려 애국계몽운동 시기 애용된 아동용 교과서 『유년필독(幼年必讀)』(1907), 3·1운동 이후 창간된 대표적인 문학 동인지 『백조(白潮)』창간호(1921), 프롤레타리아 문예운동이 활발하던 시기 당대 문인들이 참여한 『신소년(新少年)』(1930), 『별나라』(1934) 등 미술 작품 뿐 아니라 근대기 신문, 잡지, 문학, 연극, 영화 자료 등 시대상을 보여주는 다양한 매체들이 총망라되어 오래도록 후세에 기억되어야 할 올곧은 인물들의 유묵(遺墨)에서부터, 망국(亡國)의 시대에도 한국인의 정체성을 고민했던 예술가들의 고민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광장》2부. 과천관(2019.10.17~2020.3.29)
과천관에서는 1950년부터 현재까지 예술이 삶과 함께하는 의미를 모색하는 전시로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를 한국사회와 광장을 통해 되돌아보고 있다. 전시장은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서 빌려 온 “검은, 해”, “한길”, “회색 동굴”, “시린 불꽃”, “푸른 사막”, “가뭄 빛 바다”, “하얀 새”등 총 7개의 주제로 구성되었지만 사실 이 주제가 굳이 필요한지는 모르겠다.
이곳에서는 변월룡, 박수근, 이중섭, 이응노, 박서보, 신학철, 서도호, 이불,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등 작가 200여 명의 작품 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