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인] 조선 중기 이후 학문연구와 선현제향(先賢祭享)을 위하여 사림에 의해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인 ‘서원’ 9개를 묶은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 14일 유네스코 자문‧심사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이하 이코모스)로부터 세계유산 목록 ‘등재 권고’를 받아 등재가 확실시 되었다.
‘한국의 서원’의 유네스코 등재에 대한 도전은 이번이 두 번째로 3년 전인 2016년 4월, 이코모스의 반려(Defer) 의견에 따라 세계유산 신청을 자진 철회한 바 있다. 이후 이코모스의 자문을 통해 새롭게 작성한 등재 신청서를 지난해 1월 유네스코에 제출한 이후, 약 1년 반 동안 이코모스의 심사를 받아왔다.
심사 결과, ‘한국의 서원’은 조선 시대 사회 전반에 널리 보편화되었던 성리학의 탁월한 증거이자 성리학의 지역적 전파에 이바지하였다는 점에 대해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를 인정받았다. 전체유산과 각 구성유산의 진정성과 완전성, 보존관리계획 등도 요건을 갖춘 것으로 보았다. 심사평가서에는 대한민국이 등재 신청한 9곳 서원 모두를 등재(Inscribe) 할 것을 권고하는 내용이 담겼다. 등재를 신청한 ‘한국의 서원’은 소수서원(경북 영주), 도산서원(경북 안동), 병산서원(경북 안동), 옥산서원(경북 경주), 도동서원(대구 달성), 남계서원(경남 함양), 필암서원(전남 장성), 무성서원(전북 정읍), 돈암서원(충남 논산) 등 총 9개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심사평가서에서는 추가적 이행과제로 등재 이후 9개 서원에 대한 통합 보존 관리방안을 마련할 것을 권고도 하였다.
서원은 대개 사림(士林)에서 한 유학자(儒學者)를 중심으로 강론(講論)과 후진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건물과 그 경내에 스승을 추모하여 지은 사묘가 공존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서원의 시초는 주세붕은 1541년(중종 36)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이곳 출신의 유학자인 안향을 모시는 문성공묘(文成公廟)를 세워 배향해오다가 1543년에는 유생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이 시초이다. 하지만 당시 서원은 유생이 공부하는 건물만을 지칭하여 사묘에 부속된 존재에 그쳤지만 이황(李滉)에 의해서 서원이 독자성을 가지고 정착, 보급되었다.
이황이 풍기군수에 임명되면서 서원을 공인화하고 나라 안에 그 존재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과 국가의 지원을 요구하였다. 1550년 이황의 요청으로 명종이 ‘백운동서원’에 대하여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어필(御筆) 현판과 서적을 하사하고 노비를 부여하여, 사액서원의 효시가 되었다. 또한, 그는 고향인 안동 예안에서 역동서원(易東書院) 설립을 주도하는가 하면, 10여 곳의 서원에 대해서는 건립에 참여하거나 서원기(書院記)를 지어 보내는 등 그 보급에 주력하였다.
그 뒤 전국의 도처에 서원이 세워지면서 사액을 요구하여, 숙종 때에는 무려 131개소의 사액 서원이 있었다. 하지만 19세기에 이르러 서원은 지방재정을 좀먹고 관령(官令)보다 더 위세가 당당한 묵패(墨牌)로서 향촌민에 대한 착취라는 서원의 폐단으로 영조 때에는 사액은 일체 중단되기에 이르렀고 실추된 왕권의 권위를 높이며 강력한 중앙집권하에 국가체제의 정비를 꾀하던 흥선대원군은 서원의 일대 정리에 착수, 민폐를 끼치는 서원에 대한 훼철을 명령하였다. 이어 1871년에 학문과 충절이 뛰어난 인물에 대하여 1인 1원(一人一院) 이외의 모든 첩설서원을 일시에 훼철하여 전국에 47개 소의 사원만 남겨놓게 되었다.
한편, ‘한국의 서원’의 등재는 오는 6월에 열리는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아제르바이잔 바쿠, 6.30.~7.10.)에서 최종 결정될 예정이며, ‘한국의 서원’이 세계유산에 등재되면 우리나라는 총 14건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게 된다. [김진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