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 소식] ‘씨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최초 남북 공동등재 외

기사입력 2018.11.27 18:47 조회수 370

위 URL을 길게 누르면 복사하실 수 있습니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카오스토리로 보내기
  • URL 복사하기
  • 기사내용 프린트
  • 기사 스크랩
  • 기사 내용 글자 크게
  • 기사 내용 글자 작게

 

무형유산보호협약 정부간위원회.jpg

 

 

[서울문화인]한민족의 전통 씨름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남북 최초로 공동 등재되었다.

 

씨름에 대한 유네스코 등재신청서를 우리나라는 20163, 북한은 우리보다 한 해 전인 20153월에 제출했었는데, 북한은 이듬해인 2016년 제11차 정부간위원회에서 정보보완(등재보류) 판정을 받으면서 20173월 신청서를 수정하여 이번에 다시 심사를 받게 됐다.

 

이에 우리나라는 문화재청, 외교부 등 관련기관이 협의하여 오드레 아줄레 유네스코 사무총장에게 남북 씨름의 공동등재를 요청하는 서한을 제출하였고, 북한도 공동등재를 요청하는 서한을 유네스코 사무총장에게 제출하였고, 26일 오전(현지시간) 모리셔스 포트 루이스에서 열린 제13차 무형유산보호협약 정부간위원회(11.26.~12.1.)에서 24개 위원국의 만장일치로 공동등재가 결정되었다.

 

무형유산보호협약 정부간위원회는 남북의 씨름이 그 연행과 전승양상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사회적문화적 의미에 있어 공통점이 있고, 평가기구가 남북 씨름을 모두 등재 권고한 점을 고려하여 전례에 없던 개별 신청 유산의 공동등재를 결정하였다.

 

이번 결정으로 남과 북의 공통된 무형유산이 처음으로 유네스코에 공동 등재되었으며, 남북 씨름은 <씨름(Traditional Korean wrestling, Ssirum/Ssireum)>으로 등재되었다.

 

한편, 씨름의 남북 공동등재로 우리나라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20, 북한은 3(아리랑(2013.12.5.), 김치담그기(2014.11.27.), 씨름(2018.11.26.)) 보유하게 되었다.    

 

북한 만수대창작사 모사도로 본 고구려 고분벽화

- 국립문화재연구소, 북한 고구려 고분벽화 모사도도록 발간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최종덕)는 북한에서 제작된 고구려 고분벽화 모사도(模寫圖)의 역사적 배경과 문화유산 기록물로서의 가치를 새롭게 밝힌 북한 고구려 고분벽화 모사도도록을 발간하였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한성백제박물관(관장 이인숙)과 지난해 교류 협력 약정을 체결하고, 박물관 소장의 북한 제작의 고구려 고분벽화 모사도 125점과 벽화 고분 모형 5건을 조사하였다. 한성백제박물관은 고분벽화 모사도의 국내 최대 소장처로 1990년대와 2000년대 초에 북한에서 제작된 고구려 고분 벽화 모사도와 모형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와 개인 소장가로부터 기증받아 관리하고 있다.

 

도록에 수록된 모사도는 북한 만수대창작사(1959년 북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직속 미술 창작 단체) 소속 화가들이 제작한 것으로 안악 1·2·3호분, 강서대묘, 강서중묘, 진파리벽화분, 덕흥리벽화분, 호남리사신총 등 평양과 황해도 일대에 있는 주요 벽화무덤 15기와 장천 1호분, 무용총 등 중국 집안(集安) 지역의 벽화무덤 6기에 그려진 그림을 모사한 것이다. 생활풍속, 사신, 별자리, 인물 그림 등이 다양하게 포함되어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의 모사는 일제강점기 고분 발굴 당시에 석실 내부를 기록하는 수단으로 시작되었다. 해방 이후 남북이 분단되면서 북한 정권은 역사적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문화유적 발굴사업을 활발히 전개하였으며, 대표적인 문화유산인 고구려 고분벽화의 우수성을 강조하였다. 모사도 제작은 벽화의 보존과 북한 주민을 교화하려는 목적으로 시행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모사도는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모사도에 비해 벽화의 박락과 오염 상태 등이 매우 사실적으로 기록되었으며, 모사와 복제가 거듭되는 과정에서 원본과 차이를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정교화 되었다.

 

화폭 위에 생생하게 재현된 북한의 고구려 고분벽화 모사도는 남북 분단으로 인해 현장을 직접 가 볼 수 없는 우리에게 벽화의 최근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또한, 오랜 세월에 걸쳐 꾸준히 제작된 만큼 벽화의 상태정보도 추적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도록의 발간은 세계문화유산인 고구려 고분벽화의 보존을 위한 남북 공동의 노력이 다시금 재개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도 기대된다.

 

 

각저총 씨름 모사도_한성백제박물관소장.jpg
각저총 씨름 모사도_한성백제박물관소장

 

 

강서대묘 현무 모사도_한성백제박물관.jpg
강서대묘 현무 모사도_한성백제박물관

 

 

(좌)수산리벽화분 모사도_한성백제박물관소장, (우)수산리벽화분 촬영사진.jpg
(좌)수산리벽화분 모사도_한성백제박물관소장, (우)수산리벽화분 촬영사진

 

 

 

 

북한 고구려 고분벽화 모사도도록은 국공립 도서관과 국내외 연구기관 등에 배포될 예정이며, 원문은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http://portal.nrich.go.kr)에서 누구나 열람할 수 있다.

 

 

도난된 석조 불교문화재 2점 회수

- 울산 신흥사 소재 승탑부재와 창원 상천리 소재 석조여래좌상 회수

 

200010월 도난당한 울산 신흥사 승탑부재(1701년 제작)20131월 도난당한 창원 상천리 석조여래좌상(조선 시대) 등 석조 불교문화재 2점을 27일 오전에 회수되었다.

 

해당 문화재들은 본래 울산시 신흥사와 창원시 상천리 폐사지에 있다가 도난되었는데, 이후 개인자택 등지에서 은닉되고 있다가 적발되었다. 문화재청 사범단속반에서는 도난문화재를 불법으로 취득 후 보관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지속적인 수사를 펼친 끝에 이번에 회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신흥사 승탑부재는 사각의 석재에 康熙四十辛愚堂大師□□巳三月日’(강희사십신우당대사□□사삼월일)로 확인된 명문이 오목새김(음각)되어 있다. 특히, ‘愚堂大師’(우당대사)라는 명문을 통해 청나라 강희제 제위 40년인 1701년에 조성된 승탑인 것을 알 수 있다. 사각의 석재는 조선 시대 일반적인 종형 승탑의 형태와는 차이가 있어 특이한 사례로, 경남지역 불교 유적지에서 이러한 형태의 석재와 연관성이 있는 자료들을 찾을 수 있다. 이 승탑부재에는 연꽃을 돋을새김(양각)한 면석이 있는데, 울산 신흥사의 승탑석재와 동일한 문양이다.

 

이 승탑부재는 현재 비지정문화재이나, 울산·경남 지역의 조선후기 승탑과 비교 검토가 이루어진다면 기념비적인 자료가 될 수 있다. 주변 지역 승탑과의 시기적, 지역적인 유사성을 논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조선후기 석조물의 양식을 규명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울산 신흥사 신탑부재.jpg
울산 신흥사 신탑부재

 

창원시 상천리 석조여래좌상의 경우 불두(佛頭, 부처의 머리)를 확인할 수 없지만 통견식(通肩式, 양쪽 어깨를 모두 덮는 형식)의 대의를 입고 가부좌한 모습을 볼 때 여래상으로 판단된다. 여래상은 둔중한 체구에 불신의 양감이 적고 결가부좌한 양발이 모두 드러나 있으며, 옷자락을 잡은 수인의 형태 등에서 조선 시대 지방에서 조성된 불상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여래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창원시 상천리 석조여래좌상.jpg
창원시 상천리 석조여래좌상

 

 

 

    

 

현재 석조여래좌상은 국립 창원대학교 박물관에서 보관·관리되고 있으며, 승탑부재의 경우 울산시와 신흥사 관계자간 협의를 통해 인수·인계될 예정이다.

 

무주 대차리 고분군에서 신라계와 가야계 석곽묘 발견

- 무주 지역에서 발견된 전북 최대 규모의 신라 토기 확인

 

무주 대차리 고분군 석곽묘 근경(9-1, 9-2, 9-3호).JPG
무주 대차리 고분군 석곽묘 근경(9-1, 9-2, 9-3호)

 

 

무주 대차리 고분군에서 신라·가야계 석곽묘와 함께 전북지역에서 현재까지 발견된 최대 수량의 신라 토기가 확인되었다.

 

이번 발굴조사는 전북지역 가야문화유산 연구 복원사업의 하나로 진행하여 총 11기의 석곽묘가 조사되었다. 도굴 등의 훼손으로 잔존상태가 양호하지는 않지만, 축조방법과 구조 등을 파악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석곽묘는 조성 방법에 따라 2가지 유형으로 구분되는데, 2기는 강돌(천석, 川石)로 벽체가 축조되고 바닥에 시상대가 없는 반면, 나머지 9기는 깬돌(할석, 割石)로 벽체가 조성되었으며 바닥에 잔돌(소석, 小石)로 시상대(무덤 안에 시신을 안치하기 위해 바닥에 마련한 대() 시설)를 깔았다. 이러한 조성 방법의 차이는 석곽묘를 조성한 집단이 서로 달랐음을 의미한다.

 

또한, 벽체가 강돌로 축조되고 시상대가 없는 석곽묘는 장수지역의 가야계 석곽묘와 유사하다. 깬돌로 축조되고 시상대가 있는 석곽묘는 옥천 금구리, 상주 헌신동, 상주 병성동, 남원 봉대리 등에서 확인되었는데 이들 유적과의 비교를 통해 신라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석곽묘에서는 굽달린목긴항아리(대부장경호), 목짧은항아리(단경호), 뚜껑(), 굽달린접시(고배) 등의 신라 토기와 빼곡한 물결무늬(밀집파상문)가 장식된 가야토기, 쇠낫(철겸), 쇠손칼(철도자), 화살촉(철촉), 금동귀걸이 등 40점 이상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신라 토기가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현재까지 전북 지역에서 조사된 유적 중 가장 많은 수량의 신라 토기다.

 

 

무주 대차리 고분군 출토유물(금속) 일괄.JPG
무주 대차리 고분군 출토유물(금속) 일괄

 

 

무주 대차리 고분군 출토유물(토기) 일괄.JPG
[김진수 기자 ostw@naver.com]

위 URL을 길게 누르면 복사하실 수 있습니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카오스토리로 보내기
  • URL 복사하기
<저작권자ⓒ서울문화인 & sculturein.com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댓글0
이름
비밀번호
신문사소개 | 광고안내 | 제휴·광고문의 | 기사제보 | 다이렉트결제 | 고객센터 | 저작권정책 | 개인정보취급방침 | 청소년보호정책 | 독자권익보호위원회 | 이메일주소무단수집거부 | RSS top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