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있던 조선 15세기 분청사기‘이선제 묘지’ 국내로 기증

기사입력 2017.09.12 20:35 조회수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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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제 묘지, 높이 28.7cm, 폭 25


 


 


 


[서울문화인] 조선 15세기 집현전 학사 필문(蓽門) 이선제(李先齊, 本官 光州)의 분청사기 묘지가 일본으로 불법 반출되었다가 일본인 소장자 고도도로키 다카시(力孝志,1938-2016) 유족으로부터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사장 지건길, 이하 재단’)이 우선 기증을 받아 2017824일 국내에 들어왔다가 최다시 9월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이 묘지는 19986월 국내 문화재밀매단에 의해 일본으로 불법 반출되어 오랫동안 행방을 찾을 수 없었으나, 2014년 재단의 노력으로 묘지의 소재를 알게 되었다. 불법 반출품임을 모르고 구입했던 일본인 소장자와 재단의 면담이 이어졌고, 201611월 소장자가 사망한 후 유족 도도로키 구니에(力邦枝) 여사가 고인의 유지에 따라 기증이 이루어졌다. 이선제 후손인 광산이씨도문중(光山李氏都門中)도 기증에 동참하였다.


 


이 묘지에는 이선제(李先齊, 1390-1453)의 생몰년 및 행적, 가계 관련 내용을 담은 총 248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묘지의 앞면, 옆면, 뒷면 세 면에 글자를 음각으로 새기고 백상감토를 발라 긁어낸 후 마감하는 상감기법으로 표현했다. 특히, 이선제의 생몰년을 확실히 알 수 있게 되었다는 점과 제작년도가 분명한 분청사기 기준작이라는 점에서 특히 의의가 있다.


 


이 묘지를 만드는 데 사용한 태토(胎土)와 유약의 색 또한 15세기 중반 제작 분청사기의 특징을 잘 반영하며, 제작연대가 분명하고 위패(位牌)’ 형태라는 기형이 희소하다는 점에서 이 분청사기 묘지의 가치가 높다. 또한 국내 소재 15세기 분청사기 묘지 4점이 보물(577·1428·1459·1830)로 지정되어 있어서 이선제 묘지의 희소성을 가늠할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X-선 촬영으로 과학적 분석 과정을 통해 묘지는 여러 개의 태토 덩어리를 합쳐 두드려서 편편하게 만든 판으로 제작한 것이며, 묘지 태토의 조밀도와 공기층의 치밀도를 검토한 결과 조선시대 도자기의 일반적인 양상과 동일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선제는 본관은 광주(光州, 光山으로도 칭함)이며, 1419(세종 1) 문과에 급제한 후 집현전부교리(集賢殿副校理), 강원도관찰사,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2)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사후 이조판서와 예문관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그러나 그의 5대손 이발(李潑,1544-1589)이 동인의 지도자로 서인의 지도자 정철(鄭澈, 1536-1593)과 대립하였는데, 1589(선조 22) 기축옥사(己丑獄事) 때 그와 일가족은 죽음을 맞이했다. 이 때 이선제의 관직도 삭탈당하고 저술도 소실되어 그와 관련 기록을 주로 실록에서 찾을 수 있었으나, 이 묘지가 발견되어 이선제 생몰년을 명확하게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선제 묘지 앞면


 


이선제 묘지 번역문


 


유명有明 조선국 가선대부嘉善大夫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 이선제李先齊의 묘.


공의 본관은 광주光州로 경오년(1390, 공양왕 2)에 태어났으며, 아버지 일영日英은 중직대부中直大夫 사복경司僕卿이며, 조부 홍길弘吉은 봉익대부奉翊大夫 개성윤開城尹 상호군上護軍이었다. 태종 신묘년(1411) 봄 권극화權克和의 방으로 사마시에 합격하고, 세종 기해년(1419) 봄 조상치曺尙治의 방에서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에 뽑히고, 계해년(1443, 세종 25) 겨울 복야僕射에 오르고, 정묘년(1447, 세종 29) 겨울 추밀원樞密院에 들었으며, 계유년(1453, 단종 1) 겨울 경사京師에서 세상을 떠났다. 갑술년(1454, 단종 2) 봄 상여가 돌아와 광주 남촌南村 유곡柳谷 30리쯤 만산동萬山洞 조부의 묘 옆에 안장하였다. 처는 정부인貞夫人 선씨宣氏로 판사判事 윤지允祉의 따님으로 관은 보성이다. 51녀를 낳았다. 장남 시원始元은 신유년(1441, 세종 23) 생원, 경오년(1450, 문종 즉위년) 문과 급제하여 지금 경시서령京市署令이며, 사위는 생원 최확崔確이며, 차남 찬원贊元은 지금 사직司直이며, 차남 조원調元은 함평현감咸平縣監이며, 차남 한원翰元은 정묘년(1447, 세종 29) 생원으로 지금 목청전직穆淸殿直이며, 차남 형원亨元은 경오년(1450, 문종 즉위년) 생원, 신미년(1451, 문종 1) 문과 급제하여 지금 예문관 검열이다.


경태景泰 5년 갑술년(1554, 단종 2) 만들다.


-번역 이종범(조선대학교 인문과학대학 역사문화학과 교수)


 


 


이선제 묘지 뒷면


이선제 묘지 옆면


 


 


국립중앙박물관은 이선제 묘지를 919일 기증식을 가지고 920일부터 1031일까지 중근세관 조선실에서 특별 전시를 통해 공개된다. 이후 이선제 묘와 부조묘(不祧廟)가 있는 광주 지역의 국립광주박물관으로 이선제 묘지를 이관하여 호남의 중요 인물 관련 문화재로 활용한다할 예정이다. [허중학 기자 ostw@naver.com]


 


 


 


 


 

[서울문화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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