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팠던 삶만큼 가시밭길 배우는 희망이었죠” <배우 배도환>

찬바람 녹이는 따듯한 내공 쌓은 연기파 배우 배도환씨(배스타 몰 대표)
기사입력 2014.01.02 23:27 조회수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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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배우의 끼’가 있었던 연기파 배우 배도환씨는 국민들에게 그의 이름 세글자를 알리기까지 남모를 고통과 애환을 겪었다. 부유한 가정에서 하루아침에 가난한 환경으로 거칠게 내려 앉았던 그에게 경제적 안정은 그만큼 당면한 현실이 되고 말았다. 뼛속까지 배우였던 그가 늦깍이 배우의 길로 들어선 이유는 그랬다. 우등생이던 그가 대학도 장학금을 주는 곳으로 선택했고 사회 첫 진출도 배우가 아닌 보험회사로 시작했다. 첫 직장에서 그는 돈을 많이 벌기도 했지만 그의 한 켠에는 아프고 어릴 만큼 ‘배우의 길’이 비추고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가슴 속 꿈에 그리던 연극무대에 서게 된 배도환은 그의 끼를 유감없이 발휘해 관객들을 대거 끌어 모았다. 이를 기반으로 그는 KBS 14기 공채 탤런트에 당당히 합격했지만 동기들에 비해서는 나이가 많은 것이 흠이었다. 브라운관에 공식 데뷔한 배도환은 숱한 고생을 뒤로하며 무명생활을 벗어났지만 더 큰 장벽이 그를 막고 서 있었다. 이병헌, 손현주, 김호진, 김정균 등이 그의 동기들이었다. 초창기 그에게 배역이 잘 주어지지 않는 아픔을 배도환은 삭여야 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리 작은 배역도 성실해 임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정을 주는 교분에도 마음을 다했다. 그런 그에게 전무후무한 시청률을 기록한 기회가 찾아왔다. 1996년 9월부터 시작해 이듬해 7월까지 방송된 국민드라마 ‘첫 사랑’에서 의리 있는 주방장 역할을 한 명품 조연 ‘오동팔’ 역으로 배도환은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첫사랑’의 시청률 65.8%는 아직도 드라마 역사상 경이적인 기록으로 남아 있다. 앞서 오동팔 역으로 캐스팅되기까지 과정에는 그의 눈물겨운 노력이 뒷받침 됐다. 배도환은 오동팔 역으로 KBS 연기대상 신인상, 인기상, 조연상 등에 노미네이트 됐다. 이후 ‘은실이’, ‘야인시대’, ‘주몽’, ‘산 너머 남촌에는’ ‘천추태후’ ‘대왕의 꿈’ 등에서 주연과 조연을 맡아가며 열연을 펼쳐 약 30년 동안 무려 280편의 드라마에 출연하는 기염을 토했다. 배도환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8월 ‘2013 한국사회를 빛낸 대한민국 충효대상’에서 방송문화 부문 ‘방송 연기 공로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그는 지금 잠시 쉬면서 중소기업들을 위한 ‘배스타 몰’을 운영하며 이웃돕기에도 적극 나서고 있고, 비영리 봉사활동 단체법인 연예인 축구단인 ‘프랜즈 연예인 축구단’ 단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배우인생 배도환에게는 찬바람이 나뭇잎을 스산하게 나부끼는 겨울에도 미더운 온기를 느끼게 하는 정감이 넘쳐 느끼게 한다. 스카이데일리가 배도환의 유년시절부터 지금까지 살아 온 인생 짐 보따리를 추적추적 따라가는 인터뷰를 했다.


 


[서울문화인] 1996년 9월부터 시작해 이듬해 7월에 종영된 국민드라마 ‘첫사랑’은 65.8%라는 경이로운 국내 최고 시청률을 갖고 있다. 출연진들은 최수종(성찬혁 역), 배용준(성찬우 역) 등 국내 정상급의 스타들을 비롯해 성찬혁의 친구인 배도환(오동팔 역)도 출연해 시청률에 한몫했다.
 
극중 오동팔은 찬혁이가 위험에 빠지거나 힘들 때 의리 있는 든든한 친구의 역할을 했었고, 이소룡처럼 엄지손가락을 코에다 문지르는 독특한 버릇 등으로 깨알 같은 웃음을 시청자에게 선사해 큰 사랑을 받았다.
 
배도환은 이 드라마를 기점으로 무명에서 벗어났다. 현재까지 그가 출연한 드라마로는 ‘은실이’, ‘주몽’, ‘산 너머 남촌에는’, ‘천추태후’, ‘대왕의 꿈’ 등 그의 연기 인생 30년 동안 약 280 여 편에 달한다. 그는 주연을 빛나게 한 조연으로 여러 작품에 출연해 국내 안방극장의 한 획을 그었다.
 
하지만 오동팔 역을 맡기까지와 지금의 배도환이란 배우가 있기까지의 과정에는 숱한 어려움과 힘든 시절이 자양분이 돼야 했다. 무엇보다 몸을 사리지 않는 명품연기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배도환이 가능했었다는 게 주위 연기자들의 귀뜸이다.
 




어린시절부터 배우의 끼가 있었던 아이
 
1남3녀 중 둘째로 태어난 배도환(49)은 1964년 서울(종로) 태생이다. 그의 어린 시절은 선친의 사업으로 넉넉한 형편이었지만 이후 부모의 사업 실패로 힘든 시절을 겪었다고 한다.
 
“저의 생활환경은 정말 넉넉했었습니다. 약 600여 평의 집에서 살았었고 자동차도 4대가 있었습니다. 또 집안에 당구대도 있었죠”
 
“특히 구로남초등학생 시절에는 부유한 집안의 형편으로 제가 하고 싶은 연극도 했었고 공부도 잘해 반에서 1등 전교에서 8등을 하기도 했습니다”
  
배도환은 초등학생시절 우연히 접하게 된 ‘엄지공주’란 첫 연극공연에서 대사 한 마디만 하면 관객들이 웃었다고 했던 일을 즐겁게 회상하며 이야기했다.
 
“초등학생 시절 엄지공주란 작품에서 제가 감정을 이입해 진정성 있게 연극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부모였던 관객들은 어린나이였던 저의 진지함과 생동감 있는 연기가 어색하고 재미가 있었는지 대박 웃음을 짓는 것입니다(웃음)”
 
“대사를 한 마디 할 때마다 관객들은 계속 웃었고 저는 왜 웃는지 의미도 모른 채 그렇게 첫 공연을 무사히 마쳤었습니다”
 
배도환의 초등학생 시절 연기는 입소문을 타 멀리서 관객들이 하나 둘씩 모여 들어 객석을 꽉 채우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또 성극인 ‘심청전’을 할 때면 교회 계단에 앉아 공연을 지켜 볼 정도로 관객들이 많았고 자리가 없어 밖의 창문을 통해 공연을 지켜본 관객들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선친은 무대에 서는 것을 반대했다.
 
“아버님이 저의 집안을 일으키기까지 과정은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저의 선친도 한 때는 연극 기획을 하셨던 연출자였습니다. 하지만 연출자로서 성공을 하지 못했고 그래서 집안형편이 힘들었다고 합니다. 이후 개인 사업으로 성공을 하셨지만 그 시절 아버지가 연출자로서 실패했던 경험 때문에 제가 연극을 하는 것을 반대 했었던 것 같습니다”


집안 위기로 많은 제약 불구 배우의 길 가다 
 
가정에서 생활한 그는 초등학교 5학년 시절에 그의 선친이 과로와 합병증 등으로 인해 중풍으로 쓰려져 집안에 큰 위기가 닥쳐 왔다.
 
“저는 당시 어린나이라 상황이 이해가 잘 안됐던 것 같습니다. 아버님이 중풍으로 쓰려졌었고 이후 집안환경이 힘들었습니다. 넓은 집에서 좁은 집으로 이사를 몇 번 다녔었고 광명시에 있는 18평 아파트로 이사를 하기도 했었죠”
 
선친의 갑작스런 소식은 집안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넓게 생활했었던 주거환경은 좁은 공간으로 변했고, 활동 범위도 제약을 많이 받게 된 것이다.
 
그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에도 성극과 연극을 했었고 공연 때마다 매진되는 등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연극으로 빛을 발할 즈음 집안의 환경탓인지 연기에 집중되지 않아 관객에게 혼신을 담은 열정을 보여주기는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이후 그는 다시 학교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성적만큼은 상위권을 유지하며 친구들과의 우정도 깊이 맺었다.
 
배도환의 드라마 같은 ‘첫 사랑’ 말 한마디도 못해
 
“고등학교 시절 성적만큼은 전교에서 50등 내외로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첫 사랑’을 경험하고 나서부터는 성적이 거의 꼴찌로 추락을 했었죠”
 
배도환의 ‘첫 사랑’은 고등학교시절이었다.    
 
배도환은 오산고 재학 중일 때 누나 친구의 동생인 노선숙씨를 등교길 버스에서 보면서 말 한마디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때 생각하면 정말 용기가 없었습니다. 정말 저의 첫 사랑이자 짝사랑이었죠. 저는 가슴앓이를 했었고 결국 성적은 꼴찌까지 추락한 적도 있었습니다”
 
배도환은 그 시절의 기억을 잊지 못해 1997년 2월 KBS1에 방송된 ‘TV는 사랑을 싣고’란 프로그램에서 노선숙씨를 만났었다. 그는 첫 대면에서 평소와 다르게 떨리는 표정과 말로 시청자에게 신선한 웃음을 선사했다. 당시의 시청률은 39.8%를 기록했었다고 한다.
 
한 번의 재수생활과 대학서 시작된 연기 인생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집안에서는 약대를 권유했다고 한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대성학원을 다니며 재수를 했었고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장학금을 받으면서 다닐 수 있는 학교를 선택했다. 
 
“집안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인천대 전자공학과에 입학을 했는데 성적 장학금을 받으며 다닐 수 있어 이곳을 선택했었습니다”
 
배도환은 대학 1학년 때 연극동아리를 통해 연기 인생을 다시 시작하게 됐다.
 
그 시절 동아리 생활 1학년은 많아야 한 작품에 출연하는 상황이었지만 무려 아홉개 작품에 출연하는 등 성인 다운 연기를 펼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후 2학년에는 전국 대학생 연극 경영대회인 이근삼씨의 ‘욕망’이란 작품에서 열연을 펼쳐 문교부 장관 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는 인천대 학생이 처음으로 큰 상을 받은 것이어서 학교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배도환은 군대를 다녀 온 후 많은 작품에서 주연과 조연을 맡아 학교에서 유명인이 됐다고 한다.
 
“한번은 큰 무대에서 서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의 연기생활을 경험으로 오디션에 도전을 했었습니다”
 
그는 1989년 ‘공포의 외인구단’ 오디션 공고에 명함을 내 민 것이다.
 
“이현세 작가의 원작인 ‘공포의 외인구단’을 영화로 제작하는 오디션에 당시 약 1000여명이 지원했었습니다. 저는 1차와 2차까지 합격이 됐었지만 최종 면접인 3차에서 결국 탈락 돼 출연을 할 수 없었죠”
 
최종 면접에서 떨어진 그는 더욱 자신감을 찾고자 노력을 했었고 학교 공연에 온 힘을 쏟아 부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또 각 방송사 탤런트 공채 모집에 도전했었지만 배도환에게 손을 내민 곳은 없었다고 한다.
 
그는 전자공학을 전공했지만 과전공에는 관심이 없는 상황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준비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었지만 변변치 않았다고 한다. 
  
 
“저의 직업은 배우가 아닌 영업직이었습니다”
 
배도환은 대학을 졸업한 후 삼성화재의 전신인 안국화재에 영업직으로 입사를 했다.
 
“1988년으로 기억이 납니다. 제가 20대 중반이었죠. 영업직은 제가 열심히 노력만 한다면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해서 선택했습니다. 저는 회사에 입사해 열심히 일을 했었고 불과 3개월 만에 뜻하지 않은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입사 3개월 차 레크리에이션 자리에서 사회자가 펑크를 낸 것이었다.
 
배도환은 연극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각종 사회도 도맡아 진행을 해 왔었다.
 
“제가 기회를 잡았죠. 레크리에이션에서 제가 사회를 봤었고 위트 있는 이야기도 섞어가며 재미있게 진행을 했었습니다. 초청된 고객들에게 소위 대박 웃음을 짓게 한 것이었죠”
 
그는 사내에서 사회자로 정평이 자자하게 됐고, 그의 생활은 영업직이 아닌 사내 행사와 대외 행사의 사회자로서 활동을 하게 된 것이었다.
 
“영업직으로 입사를 했지만 한 달에 한 번이었던 사회자리가 1주일에 한 번으로 늘었고, 한 달 기준으로 약 20회도 넘게 사회를 보았었죠”


“대학 졸업 후 저는 각종 행사 사회자를 비롯해 시계도 팔았고 책, 판촉물 등 약 일곱가지가 넘은 직업을 가진 듯합니다. 하루에 3~4개의 일을 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사회자와 각종 일을 통해 1980년 말에 한 달 수입이 약 300만원이란 거금을 벌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레크리에이션 사회도 아니고, 영업직도 아닌 연극이었다. 
  
그는 다시 무대에 서는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한 채 묵묵히 일을 하는 상황에서 기회를 맞았다.
 
“저는 친한 선배의 권유로 성극을 다시 접하게 됐습니다. 3주 동안은 큰 배역 없이 맡은 일을 하게 됐는데, 아이러니컬 하게도 주인공이 공연 3일 남겨둔 상황에 펑크를 내는 일이 또 발생했었죠”
 
선배는 배도환을 대학시절부터 지켜보았기 때문에 공연 3일을 앞두고 주인공 역을 권유했다.


배도환은 숭의감리교회에서 진행되는 ‘죽음의 계곡을 찾아서’란 작품에 주인공인 ‘시몬’ 역할을 맡게 됐고 짧은 기간 동안 악착같은 연습을 통해 완벽한 연기로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약 2000여명 정도 관객이 찾아왔던 것 같습니다. 저도 많은 연극을 했었지만 이렇게 많은 분들이 찾아온 자리에서 공연을 펼친 것은 처음이었죠”
 
배도환은 전국에 있는 교회를 순회하면서 성극을 했다. 그는 이 연극을 계기로 무대에 서는 것이 진정한 일이라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KBS 14기 공식 탤런트 데뷔, 인사성 밝아 눈도장 찍여
 
다양한 무대와 지방의 순회공연 경험은 내공을 쌓기에 충분했다.
 
배도환은 지방공연에 자심감이 붙기 시작했고, 열연을 펼쳐 관객들에게 갈채를 받으며 성숙된 연기를 보여주었다.
 
1991년에는 그의 인간성과 프로급의 연기를 알아본 선배들의 추천으로 KBS 탤런트 모집에 다시 도전을 하게 된다. 


“4전 5기로 붙었던 것 같습니다. 이전에는 저의 의지대로 방송사에 도전을 했지만 계속 낙방을 했었고 이번에는 선배들의 추천으로 자신감도 있었고 재도전 끝에 KBS 공채 14기 탤런트로 합격을 할 수 있었죠”
 
“다행히 그 시절에는 나이 제한도 없었기 때문에 같은 동기들에 비해 저는 나이가 많은 30살에 공식적인 데뷔를 하게 된 것이죠”
 
하지만 그의 방송생활은 녹록지 않았다고 한다.
 
“저와 같은 동기들은 이병헌, 손현주, 김호진, 김정균 등이었는데 동기들과 경쟁해 배역을 따는 것이 정말 힘들었습니다. 회사에서 간간히 배역을 주기도 했었지만 비중은 극히 낮았었죠”
 
“또 맡은 배역역할 역시 너무 힘들었습니다. 한 번은 1994년 백범 김구란 작품에 출연했는데 겨울이었습니다. 영화 12도의 날씨에 똥물에 머리박고 연기를 했었고 와이어 액션으로 공중에 매달린 배역에 저체온증으로 온 몸이 얼어 꿈쩍도 못한 적도 있었죠”
 
“저는 아무 집에 들어가 양해를 구한 뒤 오물에 덮인 옷을 입고 뜨거운 물 한 바가지로 몸을 녹였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이어 인근에 사우나에서 갔었는데 입장이 안 된다는 것을 겨우 허락받고 샤워를 할 수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다행히 얼었던 몸이 녹으며 조금씩 회복됐었지만 샤워를 하면서 얼마나 서러웠고 또 울었는지 모르겠네요”
 
백범 김구 작품에서는 비록 비중이 없는 배역이었지만 그는 숱한 고생을 이겨가며 맡은 역할을 충실히 끝냈다. 배도환의 역할에 대한 성실성이 조금씩 PD와 드라마 제작사 관계자들에게 입소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는 신입직원과 마찬가지로 회사에 출근해 처음 하는 것이 인사였다.
 
방송국이란 특이성을 감안할 때 배우가 아닌 스텝 관계자들이 많이 있었지만 자기보다 연장자이거나 처음 보는 나이어린 선배들에게도 깍듯한 인사를 건 내며 생활을 했다고 한다.


“제가 방송사에 입사해 인사성이 밝았던 것 같습니다. 하루에 선배님들에게 네번 이상 인사를 한 적도 있으니까요. 저는 PD분들에게 잘 보이게 됐죠. 그 덕인지 동기들은 한 달에 1~2번의 작품에 출연했지만 저는 무려 27개의 작품에 출연을 했을 정도니까요”
 
그는 출연 작품수도 많아지고 조금씩 배역 비중도 커짐에 따라 하루에 1인 4역을 도맡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배우로써 황금기 맞이한 드라마 ‘첫 사랑’
 
배도환은 많은 배역을 맡았지만 최고의 배역으로는 1996년 9월 KBS 2TV 주말드라마인 ‘첫 사랑’이란 드라마를 꼽았다.
 


“첫 사랑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드라마입니다. 제가 방송국에서 많은 PD분도 만나보았고 저를 고용해 주셨습니다. 특히 첫 사랑을 연출한 이응진 PD님은 저의 인간성과 됨됨이를 보게 됐었고 무엇보다 발전 가능성을 높이 평가해 주셔서 저에게 배역을 주었다고 합니다”
 
첫 사랑은 총 66부작이었는데, 1회에 39%를 기록했고 불과 4회 만에 40% 이상의 놀라운 시청률을 기록했다.
 
첫 사랑의 ‘오동팔’역을 맡은 배도환은 이 드라마 출연을 계기로 전국의 시청자들에게 확실한 눈도장을 찍게 됐다. 그는 신선한 재미와 웃음으로 팬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첫 사랑이 대박이 나자 저 역시 각 프로에서 섭외가 들어왔습니다. 쇼 오락 프로그램에도 출연을 했었고 지방행사에도 적극 나서는 등 팬들과 소통을 많이 하게 됐죠”
 


이후 CF의 모델로 활동해 수입도 좋았었고 집안의 빚도 이 시절에 모두 갚았다고 한다.
 
“많은 분들의 관심을 받게 되니 저 역시 부담이 됐습니다. 거리에 나가기만 해도 ‘동팔이 오빠’라며 외치는 여성 팬들이 많았니까요”
 
“심지어 아이들도 ‘동팔이 형’이라며 저를 알아 봐 주었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과자를 사 주는 등 훈훈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저로서는 평생 잊지 못할 작품인 듯합니다”
 
그는 드라마 ‘첫사랑’에서 오동팔 역을 훌륭히 소화해 KBS 연기대상 신인상, 인기상, 조연상 등에 노미네이트에 오르기도 했다.
 
배도환은 뛰어난 연기력으로 ‘은실이’, ‘야인시대’, ‘주몽’, ‘산 너머 남촌에는’ ‘천추태후’ ‘대왕의 꿈’ 등 주연과 조연을 맡아가며 열연을 펼쳤고 약 30년 동안 280편의 드라마에 출연을 하게 된 것이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8월 ‘2013 한국사회를 빛낸 대한민국 충효대상’에서 방송문화 부문 ‘방송 연기 공로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CEO로서 배도환, 사랑을 받은 만큼 돌려드리겠습니다”



 
배도환은 지난 6월 9일 종료된 KBS1 ‘대왕의 꿈’ 이란 작품을 끝으로 휴식을 갖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도전을 위해 배스타 몰(www.baestarmall.com)을 오픈해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배스타 몰은 중소기업제품들을 연예인이 직접 써보고 좋은 제품만을 인증사진과 체험 글로 추천하는 스타 마케팅을 도입했다.
 
따라서 잘 알려지지 않은 착한 기업들은 제품의 홍보가 가능하고, 소비자들은 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함으로써 소비자와 기업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유통시스템을 구축해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스타들이 제품을 보증하고 있기 때문에 제품 신뢰도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 배도환 대표의 설명이다. 
 
“저는 중소기업들이 제품에 대해 홍보할 수 있는 활로를 찾고자 개설했기 때문에 배스타 몰에 입점 분양료는 없습니다. 기업의 제품을 스타가 보증함에 따라 브랜드 가치가 상승되고 동시에 이미지 제고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울러 일부 수입금은 사회에 환원하기 때문에 많은 분들의 사랑과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배 대표는 또 비영리 봉사 활동 단체법인 연예인 축구단인 ‘프랜즈 연예인 축구단’ 단장을 맡고 있다.
 
“프랜즈 연예인 축구단도 1996년 창단 이후 기업들의 관심과 후원으로 현재까지 약 2억 원을 사회에 기부했습니다. 앞으로 휴식기를 이용해 공익적인 사업에 몰두하여 불우한 이웃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도록 하겠습니다”


 


스카이데일리 김진수기자(jinsuac@skyedaily.com)


 


 

[서울문화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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