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연극·영화·TV 넘나든 ‘시대의 증인’ 주연. <배우 박웅>

빛 바랜 나이에 향이 깊은 배우 박웅씨…“빛나는 원석(후배) 발굴합니다”
기사입력 2014.01.01 23:11 조회수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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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웅(72) 한국연극배우협회 전 회장(한국배우연합 대표)은 올해로 연기 데뷔 50년을 맞았다. 1963년 동아방송 성우 1기로 데뷔한 이래 라디오, TV, 영화, 연극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역할을 맡으며 지난 50년 동안 배우의 인생을 걸어왔다. 출연한 작품은 자신도 전부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많았다. TV와 영화에 출연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1987년 영화 ‘백치 아다다’(주연), 2001년 SBS 드라마 ‘여인천하’, 2004년 MBC 드라마 ‘영웅시대’, 2008년 KBS 드라마 ‘전설의 고향’, 2005년 영화 ‘공공의 적 2’ 등이 있다. 현재는 KBS 일일드라마 ‘사랑은 노래를 타고’에 출연 중에 있다. 그는 데뷔 후 연극계에서 더 크게 알려져 왔다. 1970~80년대에 ‘세빌리아의 이발사’, ‘대머리 여가수’,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무엇이 될꼬 하니’ 등에 출연했고 2000년대에는 ‘금의환향’, ‘그 여자 황진이’ 등 다수의 연극작품에 출연했다. 1960~1970년 경 박 회장이 출연한 작품들 중에는 현재 자료가 남아 있지 않은 것들이 많아 실제로 그가 출연한 작품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다. 동숭동 대학로에서 만난 박웅씨는 아직도 연극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연극인으로 다가왔다. 연기를 하는 배우라면 무엇보다 연기에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다. 그는 연극계의 원로지만 어린 후배들의 앞날에 다리가 되어주고 싶은 꿈을 가진 현재진행형 배우였다. 박웅씨의 나이가 고희를 넘겨 나이테로만 보면 인생의 빛 바랜 시기 같지만 더 빛나는 배우인 것은 그가 중후한 연기에 대한 열정을 발하면서 빛나는 원석(후배)을 찾아 다리가 돼 주고 있기 때문인 듯 보였다. 박웅씨는 향이 깊게 나는 배우의 길을 무언으로 그리고 연기로 후배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중이다. 스카이데일리가 올해 데뷔 50년을 맞은 박웅 한국연극배우협회 전 회장을 만나 무대와 브라운관을 넘나든 그의 연기인생을 들어봤다.
 


[서울문화인] 박웅(72) 한국연극배우협회 전 회장은 올해로 연기 데뷔 50년을 맞았다. 지난 1963년 동아방송 성우 1기로 데뷔한 이래 연극, 영화, TV 등 여러 매체에서 다양한 장르에 출연한 베테랑 연기자다.
 
연극계 원로로 후배들에게 대접받는 위치이지만 연기에 대한 열정과 후배들에 대한 그의 내리사랑 애정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대학로에서 만난 박 회장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그의 연기 이야기를 풀어냈다. 
 




“6·25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11살이었습니다. 고향인 경북 문경에 국군이 주둔해있었지요. 골목대장이었던 저는 친구들과 함께 ‘토끼와 거북이’를 연극으로 만들어 국군과 마을주민 앞에서 상연했습니다. 군인들은 즐거워하면서 건빵을 주기도 했지요”
  
전쟁이 격화되면서 박 회장과 가족들은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1963년 동아방송 전속 성우 데뷔 후 연극에도 진출
 
어려서부터 연기에 대한 소질과 선망이 있었지만 당시 척박했던 상황에서 박 회장이 문화적 체험을 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았다.
  
다행히 고등학생이 된 그는 연극 무대에 오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연극 ‘원술랑’의 연기자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본 그는 일단 응모를 했고 비중 있는 ‘김춘추’ 역을 맡아 연기하게 됐다. 
  
1960년 초반 대학생이던 그는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겸했고 연기에 대한 꿈을 접지 않고 있었다. 마침 동아일보가 동아방송을 개국한다며 성우를 모집하는 소식을 들었다.
 
주저 없이 응시한 그는 합격의 기쁨을 맛보았다.
 
“성우 시험에 2000명 정도가 응시를 했어요. 거의 대부분이 성우가 뭔지도 모르고 지원했답니다. 왜냐면 전쟁직후라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사람 뽑는다는 소식을 듣고 무작정 응모를 한 것이지요. 저는 1, 2차 시험에 모두 합격해 정식으로 성우가 됐습니다”
 
당시는 성우가 라디오는 물론 드라마 배우의 더빙을 맡기도 했었다. 신입 성우라서 주연을 맡기에는 아직 이르고 조연자리도 감지덕지하는 위치였다.
 
그 즈음 박 회장은 경상도 사투리 때문에 호된 경험을 했다. 
 
 드라마 연출을 맡았던 모 연출가가 사투리가 자주 튀어나오는 그의 목소리 연기를 호되게 꾸짖었던 것이다.
 
짐을 싸서 당장 고향으로 내려가라며 그를 몰아붙였다.
 
“성우에게 사투리는 절망적이었어요. 원래 말투가 그런데 고쳐지는 게 쉽지 않지요. 언어학자들조차 어려서 익힌 말은 평생을 간다고 하잖아요. 어쨌거나 성우를 하려면 고쳐야했고 그 때부터 이를 악물고 노력했어요. 2년 정도 지나자 그 연출자가 먼저 인정해 주시더군요. 그 이후 주인공으로 많이 출연했습니다”
 
신입 성우로 지내는 동안 그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됐다. 잠시 마음속에 접어두었던 연극이 다시 그에게로 온 것이었다.
  
성우를 비롯해 담당 피디들 중 연극인이 많았다. 자연스럽게 연극 이야기가 오고갔고 그러다 마음이 맞는 동료들과 함께 동아방송에 내에 ‘동아극단’이라는 극단을 만들기까지했다. 
   
박 회장도 동아극단에 참여하며 본격적으로 연극과 연기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다.
  
이어 그는 1965년에는 제작극회 동인으로, 1969년에는 극단 자유 동인으로 활동하며 성우와 배우로 두 가지 삶을 살았다.
  
“성우가 밥벌이를 하고 연극은 그렇지 못했지요. 예나 지금이나 연극만으로 연극인들이 돈을 벌기는 참 힘든 일입니다”
 
성우로 돈을 벌기는 했어도 재정적으로 풍족했던 것은 아니었다. 동아방송 전속의 성우이기는 했어도 신분은 임시직이었다.
  
처음 성우가 됐을 때 받은 월급이 정직원의 1/5 수준이었다. 그의 집안도 그리 넉치는 않아 한동안 재정적 어려움이 심했다.
  
“대학로에는 당시 서울대학교 문리대학이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가난한 젊은이였지요. 성우로 돈을 벌었어도 어렵게 지냈어요. 가슴이 답답할 때마다 문리대학 앞 벤치에 가서 멍하니 앉아있곤 했어요. 그래도 연극을 포기할 수는 없었지요. 시간이 그렇게 지냈는데도 이상하리 만치 그 기억은 여전히 생생합니다”
 
방송·연극·영화·드라마 출연하며 연기 내공 쌓아
 
29살에 동료 성우였던 장미자와 화촉을 올렸다. 가장이 된 그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졌다.
 
40살 무렵 TV의 사극 드라마에 출연하며 대중들에게 얼굴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TV와 영화에 출연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1987년 영화 ‘백치 아다다’(주연), 2001년 SBS 드라마 ‘여인천하’, 2004년 MBC 드라마 ‘영웅시대’, 2008년 KBS 드라마 ‘전설의 고향’, 2005년 영화 ‘공공의 적 2’, 2011년 JTBC 드라마 ‘인수대비’ 등이 있다.
 
그가 맡은 역할은 사장님, 지검장, 선비 등으로 사회 고위층의 역할을 주로 맡았다. 현재는 KBS 일일드라마 ‘사랑은 노래를 타고’에 출연중 에 있다.
  
그러는 사이 연극에서도 그는 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1970~80년대에 ‘세빌리아의 이발사’, ‘대머리 여가수’,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무엇이 될꼬 하니’ 등에 출연했고 2000년대에는 ‘금의환향’, ‘그 여자 황진이’ 등 다수의 연극작품에 출연했다.
  
연극계에서 박 회장은 크게 인정을 받았다. 1977년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로 동아연극상을 받았던 것이다. 
  
또 1970년대 후반 출연한 ‘무엇이 될꼬 하니’로 국내와 일본 그리고 유럽관객들에게 얼굴을 알렸다. ‘무엇이 될꼬 하니’는 마당극의 효시가 된 작품이다.
  
지금이야 마당극이 흔하고 익숙하지만 1970년대만 해도 이 작품이 초연되자 비평가와 연극인들 사이에서 찬반논란이 빚어졌다.
  
정통 연극에서 벗어났다며 비판하는 사람들과 혁신적인 시도라며 박수를 치는 사람들로 나눠진 것이다. 관객들의 호응은 뜨거웠다. 호응은 현해탄을 건너 일본에도 전해졌다.
 
한일 연극 교류의 일환으로 이 작품이 연극 무대에 올려지자 일본 관객들은 전에 본 적 없는 뛰어난 작품이라며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일본 성공에 힘입은 이 작품은 1980년대 초반 유럽에서 상연됐다.
  
그후 15년간 2년에 한번 꼴 유럽 공연이 진행됐으며 박 회장 역시 참여하곤 했다.




“나는 연극후배들과 세상을 이어주는 다리”
 
박 회장은 연극계에서 원로배우로 존경받으며 여러 연극 단체에서 수장을 맡아왔다.
 
1991년 연극배우협회가 창립되면서 박 회장은 초대, 2대, 3대 회장을 연임했다.
 
1997년에는 한극연극협회 19대 이사장됐고 2009년에는 대학로문화발전위원회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연기인생 50년을 살아 온 그에게 후배 연기자들의 미래는 중요했다.
  
“대학 연기과를 졸업한 갓 어린 후배들이 연극무대에 오르기란 쉽지 않습니다. 조연은 물론 단역조차 따기 힘들지요. 기본 10년은 해야 무대에 오를 수 있었던 과거보다는 환경이 많이 좋아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도 연극분야 자체가 열악한 면이 있기에 후배들이 굉장히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신세대 배우들을 위해 무대에 오를 수 있는 기회, 즉 일자리를 많이 창출할 수 있도록 저 같은 선배들이 노력해야 겠지요”
  
후배들에 대한 애정이 깊은 박 회장은 후배들에 대한 따금한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연기자라면 방송, 영화 어디든 출연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연극을 방송과 영화로 가기 위한 전 단계 쯤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연기를 잘해서 연극도 하고 방송, 영화도 하는 것이지 방송과 영화를 하기 위해 연극을 하는 것은 앞뒤가 바뀐 것입니다. 배우는 연극을 통해 무대에 서는 경험을 자주 가져야합니다. 이것은 배우의 태생입니다”
  
“어떤 후배도 저에게는 모두 소중합니다. 제게 허락된 시간동안 연극계와 후배들을 위해 노력하고 싶습니다. 저는 그들의 든든한 후원자이고 숨겨진 원석을 발견해내는 기획자입니다. 무엇보다 그들을 세상과 연결시켜주는 다리가 되고 싶습니다”


 


기사. 스카이데일리 민현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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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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